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8
앞서 밝히는 ‘시기오놋에 맞춘 기도’는 ‘열정적인 시가(詩歌)’를 의미한다. 시기오놋은 빠른 리듬과 열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유도하는 음악의 한 형태이다. 시편 7편과 같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하고 시작하는 격하고 긴박한 내용을 담았다. 이는 새로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어제 오전 아내는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당장 내일모레 이사하기로 한 집의 주인이 계약을 파기하겠다며 당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바, 거주 외 목적의 사용을 금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 걸 잔금을 입금하고 열쇠를 받으려는 찰나에 아내의 카톡 프로필사진에서 ‘공부방’에 대한 내용을 본 모양이다. 아내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당장 그 날짜에 맞춰 입주청소업체나 이사, 도시가스부터 유선방송 등등 가장 큰 문제는 노모를 데리고 길바닥으로 나앉게 생긴 것이다. 나는 부동산으로 전화를 넣어 상황을 듣고, 저쪽에서 그 조항을 들어 계약위반이라며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직 이사를 한 것도 공부방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너무한다 싶어 내가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할 말 없다며 부동산과 이야기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난감하게 됐다. 당장 집을 비우고 나올 판인데, 좀 너무한다 싶었지만 계약서에 그리 명시되었고 주인이 그렇다는데 별 수 없었다. 다급하다고 해결될 건 없었다. 순간 주의 이름을 부르며, 대한주택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하루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을 뻔했다. 급히 보증금반환을 중지시키고, 다음 날 직접 들러 사유서와 자필서명으로 우선 정지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수십 곳에 전화를 돌려 일을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손위처남내외는 다른 빈 집을 찾고, 다른 동 어디로 계약을 했다. 앞서 공부방을 할 것이고 예배를 드릴 것이란 사실을 모두 밝혔다. 하루가 길고 급박하게 지나갔다. 결국은 더 넓은 평수로 더 좋은 위치의 새 집으로 연결되었다.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우린 다시 하나님의 관여와 다스리심을 누렸다. 간발의 차이로 이사 날짜를 일시정지 할 수 있었고, 그 외 모든 일정이 조금씩 미뤄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마음을 졸였고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하고 분주하였다.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내용이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합 3:1).” 그리고 저는 놀란 것을 숨기지 않는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우리로 ‘주께 대한 소문’을 듣게 하신다. 가령 욥은 그간의 고초를 겪고 주께 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주께서 알게 하신 계시, 이 표현이 간접적이든지 직접적이든지 우리로 듣게 하시고 주의 뜻을 알게 하심은 놀랍다.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욥 28:22).” 여러 급박한 일 중에 하나일 수 있는, 그야말로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던 사태를 통해 우리는 새삼 하나님의 개입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시의적절하고 치밀하셨는지를 또 한 번 알았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한다. ‘부흥케 하옵소서’ 하는 의미는 그 뜻에 따라 ‘살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때에 살리신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다. 현실적인 낙망과 낙심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에스더의 신앙을 기초로 한다. 우리가 어떤 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시 77:9)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모든 게 진정이 되고 일처리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우린 알았다. 당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라 여겼는데 하나님은 모든 일을 순탄하게 하셨다. 도리어 ‘그런 집주인’을 만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급히 선회하셨던 것이다. 행여 이사를 끝내고 애라도 한둘 가르치다 이번 일이 생겼으면 어쨌을 뻔했나? 아내와 나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며 뒤늦게 머쓱해하며 감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모든 게 다 감사하였다. 어찌어찌 우리가 무마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시의적절 하게 막으셨고, 진행하게 하셨다. 늘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돕는 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4:4).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리하여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합 3:3).” 할 때, ‘데만’은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사해 동남쪽 지역이다. 바란 산은 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 산이 많은 지역으로 비교적 크고 광활하여 북으로 가데스 바네아와 경계 지역으로 북동쪽에는 에돔이 인접하고 남서쪽으로는 애굽이 인접해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기 위해 나타나신 장소이기도 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1:16-17).” 그것이 어디든지, 하나님은 임하시고 나타내신다.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합 3:4).” 그럴 때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여기서 ‘광선’은 하나님의 광채로 계명을 받을 때 시내 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어제의 일이 누구에겐 그저 우연히, 운 좋게 해결된 것 같으나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있다. 이와 같은 ‘광명’은 화려함이 아니라 경외감이다. 하나님이 감당하실 때 이를 아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며 기쁨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후에 있을 심판과 관련하여 두려워할 줄도 안다. 굳이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마음은 없지만 저는 저의 헤아림으로 저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이는 마치 포도주와 같아서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잠 23:32).”
돈이 있거나 건강하거나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는 빚진 마음으로 감사와 영광을 올려야 할 일이지, 더욱 이를 탐하고 같이 대거리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 위약금을 물리고 어쩌고 할 일은 아니었다. 누구는 왜 바보처럼 그냥 넘어 가냐며, 그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하겠다는 데도 그렇듯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법을 운운하는 것에 같이 대응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무서운 일은 그런 게 아니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주변을 보면 이런저런 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는데, 이를 세상 논리로 접근하면 싸움밖에 길이 없다. 같이 진흙탕에 뒹굴어야 한다. 그럴 거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92:4-5).
우린 이를 알았다. 살면서 사는 동안 이와 같은 일에 주의 놀라우신 도우심을 안다면,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145:6-7).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8).
곧 오늘도 이와 같이 말씀에 앉는 것은 행여 나의 심중에 주의 말씀이 아닌 나의 판단과 아집이 세상 논리와 이치로 어떤 일을 대응하고 마주할까 하여 두려워서이다. 이때 주님은 이르시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비록 우린 그때마다 못하겠습니다, 안 합니다, 싫습니다… 하면서 주의 뜻에 손사래를 치지만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은 데만과 바란 산에서부터 오신다. 그릇되고 어그러진 우리의 중심에서 주가 역사하신다. 이를 알면 알수록,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2, 8).
같이 들러붙어 싸운들.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진들. 욱, 하는 마음에 그렇듯 보복하고 싶고 화가 나지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보며 저들의 완악함을 두고 두려워할 때,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비록 그러하나 곧 우린 주의 선하심으로 고백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이것이 우리의 무기고 힘이다. 이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하여,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3).
이와 같은 고백으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6).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곧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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