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

전봉석 2023. 10. 13. 05:08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습 1: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7-8

 

 

스바냐가 사역할 때는 요시아 왕 시대였다. 당시 앗수르가 본국의 사정으로 서쪽 지역을 행사할 수 없었던 때이다. 요시아 왕은 개혁을 시행하고 국토를 넓혀갔다(왕하 22:1-23:20).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다. 아마랴의 증손이고 그다랴의 손자로 구시의 아들이다. 스바냐의 사 대째 조상으로 히스기야를 소개한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한 왕 중의 하나였다. 스바냐의 아버지 구시는 그 이름 자체로는 구약에서 종종 에디오피아 사람과 연관되어 등장한다. 그렇다고 에디오피아 사람은 아니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은 믿음의 계보를 알린 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습 1:2).” 하고 선언한다. 노아의 홍수 때를 연상케 한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7).” 곧 ‘진멸하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을 알린다.

 

그것도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습 1:3).” 이 부분에서 ‘거치게 하는 것’은 우상을 가리킨다. ‘우상을 악인들과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선언하신다. 특히 ‘진멸하고, 멸절하리라.’ 하고 강조함으로 철저한 파멸이 될 것을 알게 한다.

 

그때에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습 1:4).” 하고 이어지는데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하심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사 5:25).” 지금 이 진노가 주의 자녀들로 인한 것임을. 이는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9:17).”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다섯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하실 때, 바알은 농경의 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다.

 

둘째,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하시는데, ‘그마림’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데 명예로운 칭호로 알려졌다.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도 진멸시키실 것이라 한다.

 

셋째,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진멸한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다. 분명히 말씀하시길,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넷째,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진멸하신다. 말감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왕’을 뜻한다. 또한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한다. 솔로몬도 후궁들을 위해 ‘밀곰’의 산당을 지었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왕하 23:13).” ‘밀곰’은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에 빠뜨렸다. 말감과 여호와를 혼합하여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도 성행하였다. 이처럼 왕을 섬김으로 왕이 허용한 말감도 하나님을 대신하였다.

 

다섯째,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진멸한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 1:6).” 배교자들과 불신앙자들을 통칭한다. 여기서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하여, 찾고 구하는 자는 내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를 바라며 그 말씀을 즐겨 행할 터인데 배교하거나 불신앙에 빠진 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엄히 경고한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주의 백성들이었다. 이를 들을 때,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하고 외친다. ‘침묵하라’ 하심은 말이 앞설 때 여러 의견과 구상이 분분해진다. 우리가 어떤 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또는 그 문제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은 서로의 말이 주의 뜻을 흩뜨린다.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을 들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신앙적인 관점으로는 주의 뜻을 어지럽히기 십상이다.

 

어떤 문제든, 문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 하나님이 나를 대면하시고자 부르시는 자리다. 하나님과만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말이 난무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귀가 가려워지면 여러 선생을 두게 되어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즉 우린 사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여호와의 날’이 다가왔다. 침묵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움으로 주를 바라게 한다.

 

가만히 주 앞에 침잠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며칠이 될지, 혹은 몇 년이 될지 우린 모른다. 다만 그 시간 동안 주께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기껏 주의 종으로 부르셨고 하기 싫다는데 하게 하시고는 모든 게 증발한 것처럼 진공상태를 만들어버리실 때가 있다. 것도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이나 공황상태로 짓누르시니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나야말로 ‘역마살이 꼈다’ 할 정도로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한 사람도 없다. 오죽하니 아내는 어딜 가면 간다하고 가라고 하소연을 했을 정도이다. 불쑥 떠나 속초로, 여수로, 지칠 때까지 운전을 하고 달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서 3박 4일 만에 서해로 해서 남해를 지나 동해 7번 국도를 타고 전국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때 한 일은 거의 운전하고 차에서 자고 했던 것 같다. 그랬던 나를 오늘 이처럼 묶어두심은 잠잠하게 하시려고,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89:34).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신다. 말씀을 행하시는 데 있어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심은 내 ‘마음을 넓히시려는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119:32).

 

이는,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59-60).

 

나는 감히 내가 어떠하였는지 말할 수 없다. 나의 날들을 돌아볼 때 여전히 용서가 안 되는 일들이 많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예전에는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겼던 일들이다. ‘다들 그러고 살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삼기도 했던 일이다. 그러나 말씀이 나로 진정케 하신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히 3:15-16).” 즉 내 안에 ‘따라 나온 무리’ 곧 ‘잡족’과 같은 속성은 여전하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8).” 곧 내 안의 ‘잡족’ 같은 속성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욕구를 가졌다.

 

이에 나로 잠잠하게 하심은 ‘여호와의 희생의 날’을 유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습 1:9).” 내 안에 여전히 거역하는 마음이 있어 ‘어떤 일’에 있어 감정을 충동한다. 욱, 하고 터지는가 하면 끝없이 가라앉게도 한다. “그 날에” 곧 그 “문턱을 뛰어 넘어서… 내가 벌하리라.” 하심을 주의한다. ‘자기 주인’을 자신으로 놓고 사는 한 이 우상으로부터 놓여나질 못한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정의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내가 받은 부르심이 귀하다. 이 크신 은혜에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의 육체로 연약함을 지게 하셨다. 이는 ‘가시 곧 사탄의 사자’다. 이것으로 고통이 따르고, 고통에 겨워 주를 멀리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처럼 나 또한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내 안의 ‘말감’을 나는 잘 안다. 그것으로 추구하며 살았던 것들도 여전하다. 사람을 좋아하고 동시에 경계하며 살았다. 사랑예찬론자이면서 냉소주의자로 살았다. 가급적이면 마음을 닫고 가식적으로 ‘친절한 타인’이 되려 하였다. 딱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이 친밀하게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오늘 10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하실 때, ‘어문’은 다메섹 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북쪽 문을 가리킨다. 이곳은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방향이다. 즉 나의 ‘어문’은 열등감이고 자격지심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이를 곱씹는 버릇이 있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것으로 나는 번번이 무너졌다. 어릴 때의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여전히 나의 이 ‘어문’은 열려있다. “이 구역에서는 울음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내 안의 노여움의 출처를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하여 말씀은 ‘잠잠하라’ 하신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나는 목사고시에서 두 번째 떨어지면서 알았다. 앞으로도 계속 떨어져도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목사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내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간다는 것을. 내 안의 ‘막데스 주민들’ 곧 세상을 바라며 상업에 빠진 족속으로, 애굽에서 같이 나온 여러 잡족에 해당하는 마음이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습 1:14).” 오늘 우리의 날이 그저 안이하고 태평한 때가 아니다. 영적으로 함몰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주저 없이 하나님을 희화하며 산다. 이때 믿는 자들이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모압과 같아서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렘 48:11).”

 

심판의 대상인 줄 모르고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역사와 무관한 것처럼 무감각과 무관심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포도주에 가라앉은 찌끼와 같아서 그냥 내버려둘 경우 질 좋은 포도주를 망친다. 그렇듯 나의 영혼이 무기력한 상태로 놓이지 않도록…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오늘도 시편으로 주께 아뢴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2).

 

하실 때 나로 뜨끔하여 주 앞에 잠잠히 세우시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

 

그리하여,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7).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