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전봉석 2023. 10. 19. 05:1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슥 2:8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 10:16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슥 2:1-2).” 이는 세 번째 환상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메시야에까지 확장된다. 앞서 두 번째 환상이 대적들의 파멸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번 환상은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묘사하고 있다. 두 번째 환상이 당대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면, 이번 환상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스가랴는 측량하는 천사와 해석하는 천사, 그리고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천사를 본다. 이 측량사는 ‘여호와의 사자’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재건, 나아가 메시야를 준비하고 있다. 저는 예루살렘의 길이와 폭을 척량하러 간다. 그의 대답은 경계를 재는 것으로 이를 회복시키고 약속된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겔 40:5)” 이를 가지고,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 11:1).”

 

훗날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설명하면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곧 오늘에 이르러 우리 영혼을 회복을 구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한다.

 

어느 시대에나 우리를 멸하고자 하는 악한 세력은 존재하였다. 앞서 1장 18-21절에서 두 번째 환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중수를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 하나님이 멸하실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개의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니라(슥 1:18-19).” 곧 오늘에도 여전하여서 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 역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러므로 바울 사도 역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오죽하니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도 우리 모든 근본은 비극이라고 했을까? 하여 많은 종교들이 낙관주의로 흘러 신비주의로까지 이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감추거나 낙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단언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에 따라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혜서는 이를 그대로 대면하게 한다. 우리에게 순수 신비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편은 기도로 이 현실을 찬송하게 한다. 잠언은 삶으로 살아서 이를 취하게 한다. 욥기는 고난당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전도서는 오히려 즐거워할 줄 아는 방법을 알려준다. 아가서는 고난 가운데서 사랑하게 한다. 성경은 고난을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와 그의 아들을 아들로 믿는 자의 믿음을 확증할 뿐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의 고난은 피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알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이와 같은 말씀은 우리를 허투루 망상하지 못하게 한다. 누구의 주장이나 의견을 인용하여 설명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고난은 다만 지혜를 더한다.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현실의 근본은 비극적이다. 비극은 논리적이지 않다.

 

왜 하필 나에게…? 하고 묻게 한다. 모처럼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저도 장모를 모시고 사는데 지난 8월에 췌장암 말기라는 판명을 받고 모두가 고통 가운데 지낸다. 왜 하필… 하고 이어지는 저의 여러 말들은 오늘에 닥친 비극적인 상황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서 겉돌았다. 저의 처는 혼자라 이 모든 고통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저의 말은 겉돌았고 나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감기다 삼켜졌다. 어떤 말로 위로가 될까? 하여 우리 삶의 바탕은 비극으로 이는 처음 사람 아담이 에덴에서 나올 때부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죄의 속성이다.

 

그리하여 자칫 종교화 되면 신비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베드로도 그런 함정에 빠졌다. 저는 변화산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며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9:33).” 현실을 등지고 그와 같은 체험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타 종교와 같이 속세를 떠나 자신을 비우고 살려는 것도 모든 종교의 허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제지한다. 오히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37-38).” 현실은 비극적이며 그 난장 가운데 우리를 보내신다.

 

나의 이 좋은 시간, 고독의 체험, 하나님과만의 만족스러운 시간을 거둬내고 자꾸 사람 속으로 밀어 넣는다. 누구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저들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며 오히려 사탄과 대면하여 싸우게 하신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39-40).” 악은 언제나 득세하는 것 같으나 고난 속에서 우린 승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사는 게 지옥이라, 엎친 데 덮친 친구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며 내가 물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교회는 다니셨니? 너는? 하고 물은 것은 우리가 믿음을 잃으면 전부를 얻는 것보다도 불행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사느라 그저 멀리 떠나 서울로 오가며 사는 삶이 괴로운 것일 테고. 저는 아직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산다. 사연은 다를 뿐이지 늘 같은 지점에서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것만 같아서, 우리가 사는 척도는 우리의 주관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를 저에게 말한들 저는 여전히 들을 귀가 없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시 119:160).

 

이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이 지혜는 모든 조화의 시작 때부터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 26).” 곧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보고, 알 수 있는 마음이 은혜다. 그러할 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우리에게 복음이 절박한 것은 고난에 밀려 떠내려가는 영혼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저녁마다 장모와 함께 예배드리며 성경을 풀어 전할 수 있는 것을 귀히 여긴다. 믿음은 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 안 믿는 자와 다를 것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천국을 사모하지 못한다. 하루 종일 TV 앞에서 흘러간 노래를 듣던 우리 장모는 이제 더듬더듬 성경을 잃고 저녁이면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몸에 밴 오랜 습관을 어쩔 수 없다고 하나 이 또한 옅어지다 그 위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덧입혀져 주의 나라를 바라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사상 이런 축복은 실현된 바 없기 때문에,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슥 2:4).” 곧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느 7:4).”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나 또한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이 남아서 오늘을 산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확신한다면 우리가 이루어갈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땅의 모든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확장하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하는 놀라운 승리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결국 지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하며 고통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오늘 우리가 우리로 살면서 인정하게 되는 것은 ‘바벨론에 임할 심판’과 ‘예루살렘에 임할 축복’을 아는 것이다.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7, 9).”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며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곧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시편은 기도하게 하고, 전도서는 고난 중에 즐거움을 알게 하여, 욥기는 우리로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를 일깨우고, 잠언은 그에 따른 실천의 지혜를 확신하여, 아가서는 우리로 주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한다. 이에 모든 성경은 삶의 근본이 비극인 것을 기꺼이 드러내고 그 가운데 주가 우리 곁에 계심을 알린다. 그러므로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0:1, 12).

 

우리로 주를 바라며 주께 기도함으로 주의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이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