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전봉석 2023. 10. 20. 05:00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슥 3:1-5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 10:14

 

 

사탄이 ‘여호수아’를 고소한다. 이에 대해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한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의 보증이 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옷을 덧입히신다. 어제 저녁예배로 드리면서 같이 나눈 말씀에서,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곧 예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사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오늘 본문에서 묵상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다. 사탄도 그 옆에 서서 우리의 죄악을 두고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이 쓸모없고 더러운 것을 지적한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책망하신다. 그리고 분명히 하시길 그런 나를 택하신 이가 여호와가 되심을 알게 하신다. 우리가 죄악으로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고, 여호와께서는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신다. 곧 우리의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신다. 그리고 오히려 ‘정결한 관’을 우리의 머리에 씌우신다. 우리는 정결한 관을 머리에 쓰고, 아름다운 것을 입고 여호와의 천사는 우리 곁에 섰다.

 

우리는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우리는 구별된 ‘레위 지파’로 주를 섬기는 자들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신 10:8).” 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44:15).”

 

사탄은 욥을 고발하던 자이다. 모든 성도들을 대적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저는 참소하는 자이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사탄은 실존하는 영으로 결코 허상이 아니다. 스가랴는 네 번째 환상으로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사탄을 본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성경은 이르시길,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신다. 곧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우리는 스스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만이 절실하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요즘 저녁마다 장모와 함께 예배한다. 우리의 죄악이 주의 긍휼하심으로만 다시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를 없이 할 수 없다. 에스겔 선지자도 보았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2-3).” 오래된 뼈와 같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영혼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설 때 어찌 몸 둘 바를 몰라 송구할 뿐 감사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더러워진 옷을 벗기시고 자신으로 의의 옷을 덧입히셨다. 오늘 4절,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이때 우리의 반응은 탕자의 애통해하는 심정과 같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1-22).”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중에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새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나를 구원하시고 직접 자신을 걸고 보증이 되셨다. 이를 오늘 본문 5절에서 읽는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곧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겠으며 십자가보다 더 분명한 담보가 무엇이겠나?

 

예수께서 약속하시길,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세상은 받지 못하고 우리는 아는, 성령의 역사로 오늘 여기에 서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를 위하여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으로 우린 산다. 진리의 영으로 오늘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믿고, 확신하여 산다. 이 땅에 사는 일은 비극이다. 여러 어려움이 우릴 연단한다. 그리하여 시편으로 기도를 배우고, 잠언으로 참 지혜를 알아, 전도서로 주가 주시는 즐거움을 살고, 아가서로 주와 사랑을 한다. 내가 이처럼 지혜서를 좋아하는 것은 그 안에서 나의 무지했던 날들이 찬양이 되고 기쁨이 된다. 축복은 말씀에 따른 순종으로 온다. 오늘 7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곧 우리가 이처럼 말씀 곁에 있을 때,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 11:13-15).”

 

이와 같은 말씀으로 증거삼아 살아갈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께서 이에 보증이 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나는 이처럼 말씀 앞에 서려하고, 말씀은 나로 바른 길 가게 하시려는 것이니, 마치 친구와 같이 그와 함께 동행 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슥 3:8).” 오늘 말씀은 그리 들린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4-15).” 고로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일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5-6).”

 

나는 요즘 교회를 놓고 기도한다. 그동안 나로 다윗의 동굴과 같이 혹은 주와 은밀한 골방에서 은둔 아닌 은둔자와 같이 놓아두셨다면, 이처럼 주의 강권하심으로 ‘주안으로’ 이사하게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내는 이사 문제로 분주하고 나는 교회를 두고 마음만 부산하다. 어떻게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을 찾아야 하고, 그리 허락하시면 주가 주시는 용기로 안정제를 먹어가면서라도 부딪쳐야 한다. 그럼 또한 새 힘을 주실 것을 안다. 그러기까지 내 안에 이는 수많은 질문과 헛된 두려움이 나를 주저하게 할 따름이다. 이때에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도와주실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로 순종할 수 있는 주의 권능을 더하여 주시기를. 그러할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 이 모든 결단과 의지가 내 것이어야 했다.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한다는 마음으로, 주가 예비하신 곳이 있을 것을 안다. 그렇게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나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내 안의 호소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이 변화산과 같은 편안하고 황홀한 지경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주가 하시는 일로, 오늘 10절은 알린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0).” 나는 상한 영혼을 마주해야 한다. 심지어 저들을 초대해야 한다. 나로 꿈꾸게 하시는 교회는 ‘작은 도서관 카페’와 같은 교회로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인다. 누구라도 들어와 책을 보거나 차를 한 잔 마시면서 말을 건넬 수 있다.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나는 요즘 <꽃잎 차의 모든 것>(송주연, 황지영. 열린세상)을 두고 차를 우리는 공부를 한다. 언제라도 상한 심령을 마주하고 상대할 수 있을까? 하고 사탄은 자꾸 앞서 걱정을 심어 넣는다. 물론 나는 정적이라, 변수를 싫어한다.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일 때 안전을 느낀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이를 못 견뎌서 불안을 느낀다. 그러한 불안은 고착되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러했음을 이제는 안다. 한데 주가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젊고 늙고의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기보다, 내 의지를 꺾고 주의 뜻에 나의 팔을 벌릴 때 주가 띠 띠우신다.

 

누가 묻기를, 할 수 있겠어? 하자 나는 금세 자신감을 잃고 글쎄, 하고 대답을 얼버무린다. 나는 그래서 주의 일에 있어 자신감을 가지고 어떤 확신에 겨워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자를 부러워하면서도 위태롭게 여긴다. 나는 내가 할 수 없음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 앞에 인정하고 구한다. 주가 책임지시라며 그 앞에 엎드린다. 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이를 확신하면서,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시 119:63).

 

때론 몸을 숨기시는 하나님을 찾으며,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나는 애타는 심정으로 주께로 더 나아가게 하심을 안다. 그렇게 하시는 의도도 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55:1).

 

나로 주를 더욱 찾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심이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이러한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10:2-3).

 

주께 아뢴다는 것,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2-13).

 

이와 같이 주께 아뢰며 맡기신 사명을 성취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더딘 것 같으나 무던함으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시기를.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