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슥 4:10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3-4
성령의 일깨우심이 없으면 은혜를 알지 못한다. 우리 마음이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성령으로 할 수 있다. 본디 이 마음은 땅의 것에 매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깨우니’ 하는 데서 의미를 살피게 된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슥 4:1).” 우리를 깨우는 이유가 있다.
저가 물으신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2-3).”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등대의 역할하고 있는지.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으로 빛을 발하여야 하는데,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6).”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을 때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7-18).” 우린 항상 세상을 원하나 힘써야 할 것이 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결국 오늘 말씀의 의미는 교회가 빛을 발하여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돼야 한다. 다섯 번째 환상으로 스가랴는 일곱 등잔을 보고 그 옆에 감람나무를 본다. ‘순금 등잔대’는 예수를 예표하며 교회의 본분을 알게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교회의 사명은 동일하여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전에 나는 어떠했는지, 생각하게 하신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를 인정함으로 오늘의 은혜가 새롭다.
오늘 이사로 며칠 동안 어지러운 날들을 보냈다. 어제는 문득 이곳에서의 16년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변하였는지. 모든 게 다 감사할 것뿐이었다.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며 감격하였던 것은, 성령으로 오늘의 내가 예전의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였다.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아내 덕분에 나의 모든 게 평탄하였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이 길이 더는 없을 것이란 생각에 어둠조차 그리울 것 같았다. 교회로 올라와 늘 그렇듯 말씀 앞에 앉아 주가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한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우리 각 개인이 교회가 됨을 생각할 때, 오늘 말씀은 간접적이면서도 또한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우리 영혼은 모두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과 빛을 공급받아야 산다.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우리 곁에 서 있다. 이에 대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곧 주가 하지 않으시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시 18:28).
내가 밝게 켜져야 어두운 곳을 밝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나로 주를 따르게 하신다. 우리 속에 여러 계획이 있으나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그러므로 주께 맡김은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다. 나는 주먹구구식으로 일에 대처하나 주가 그 일을 고르게 다스리셨다. 모든 일은 순조로웠고 생각지도 못한 것으로도 주가 도우셨다. 나는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그 동선을 따라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다. 주가 나의 연약함으로 나로 늘 새 힘을 더하신다. 오직 주가 일하신다는 것을, 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는 다만 이에 따른 증인이다. 바울도 이를 인정하면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령이 나를 이끄시고 나의 모든 사유함을 주장하신다는 것. 그러할 때 내 앞을 ‘가로 막은 산’도 평지가 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 4:7).”
산이 높은 것은 그 앞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다. 문제를 코 앞에 두고는 문제만 크게 보인다. 멀찍이 섰을 때 높은 산은 한 뼘도 아니고, 더는 문제가 문제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우린 은총, 은총이 나에게 있을지어다 하고 외친다. 지겨울 정도로 이사를 많이 했었다. 아버지의 전투적인 목회현장은 그야말로 돌격하는 군병과 같이, 나의 학창시절은 군장을 풀기 무섭게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고궁이나 오래된 나무를 마주하면 경이롭다. 한곳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았다는 이를 만나면 공연히 주눅이 든다. 그만한 안정은 전쟁 같은 인생에서 가히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저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연상하게 한다. 나의 어릴 적 잦은 이사는 그와 같아서 돌아보면 아버지의 목화현장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게 은총이다. 교회마다 여러 군상의 사람이 있었고, 저들은 쓸려 다니는 안개 같았다. 일찍이 사람의 사람됨을 배운 곳은 교회에서이다. 여러 사람이 주 앞에 모였으나 저마다의 관심과 이유로 성령으로가 아니면 그 마음은 하나 되지 않았다. 입 안의 혀처럼 굴다 어느 날 칼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포기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마침 이사하는 날, 또 어딘가로 옮겨 새로운 환경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나에게는 스트레스다. 들떠있는 아내와는 대조적이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내와 정적인 나의 갈등은 그래서다. 고집스럽지만 이사 갈 집과 동네를 일부러 가보지 않았다. 예전에 살았던 기억도 있지만 나는 정든 것에 더 애착을 갖는다. 나는 여기서 살면 안 되나? 하고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가 철딱서니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주가 벌이시는 일이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로 내어놓는 일이 아니겠나? 마치 욥의 삶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그러할 때 우린 주어진 싸움에서 주를 바라는 것으로 영광이 된다. 나에게 이사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보다 더는 있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우친다. 오죽하니 매일 나서던 새벽의 풍경이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어찌됐든 16년을 햇수로 살았다. 아이들이 자랐고 나의 변화는 놀라울 따름이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9).”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결국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곳으로 올 때의 나는 하나님과 멀리하며 살았었는데, 그동안 참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사실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셨는지, 오늘에 이르러 어쩌시려고 이와 같은 은총으로 나를 세우셨는지…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오늘 말씀도 주가 물으신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오늘의 이사나 교회를 옮기는 일에 있어 이를 ‘작은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의 뜻을 알 수 없지만 허투루 일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기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주가 일하심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다. 모든 만사를 다 아시고,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b)..”
고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오늘의 이 모든 일 또한 주가 나태고자 하심이 있다는 것인데, 우린 다만 주가 이끄시는 대로 맡길 뿐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7-8).” 그러므로 묵묵히 주를 신뢰한다는 것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어느 훗날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나로 16년 전의 나와 다르게 주를 찬송하게 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4).
오늘 시편에서 영원히 들어갈 본향을 생각한다. 그 앞에 나를 세울 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 땅에서의 오래된 나무나 고궁이 주는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도 경이로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함이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이곳에서 16년이 지난 나는 이제 전혀 다른 나로 산다. 곧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내가 주를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늘이 또 어떠하든지 우린 이미 이기어 놓으신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 그때마다 말씀은 붙드셔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에,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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