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 150편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23. 10. 19. 17:14

231022 주일

 

시 150편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시 150: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50: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 150: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시 150: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시 150: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들어가는 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시편 마지막 편인 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 시’이다.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우리의 삶에서 찾는다. 실제 우리 삶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와 같다. 욥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바울도 역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실제 우리 삶의 전쟁을 일깨웠다.

 

시편은 그런 사람과 자연 곧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그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라고 한다. 다시 고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욥을 주목하면 ‘그는 고난으로 온전한 자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와 같은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은 욥과 같이 우리가 고난에 임하는 자세에 달렸다. 욥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그리하여 저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8).”

 

다시 말하지만 고난과 연단을 통과하여 우리가 의인이 되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에 우리의 자세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의 기쁨이 될 수는 있다. 가령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음껏 욥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음으로 주의 영광을 드러냈다. 곧 욥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 것이지 복을 사랑한 게 아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고난의 불가해함을 알린다. 고난이란 언제나 극적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물을 때 우린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이를 시편은 우리가 일상에서 고난으로 지혜를 삼고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린 우리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고난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곧 우리 신앙의 시금석은 말씀에 따른 순종이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시편은 이를 우리 삶 가운데서 찬양한다. 잠언은 이로써 그 지혜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본문이해

 

오늘 시편으로 우린 150편의 시편 대장정을 일단락 짓는다. 다음에 이어 전도서를 본문으로 삼을 예정이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욥기와 잠언 그리고 시편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와 목적을 보다 실제적인 관점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시편은 일관된 목소리로 ‘호흡이 있는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친다. 한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소에서 뿐 아니라 우리 발이 닿는 곳에서 주를 찬양하라고 한다. 찬양은 기도이고 삶이다. 그리 사는 일이 순종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며, 천국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찬양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시편 1편에 답이 있다. 즉 ‘복 있는 사람’이 찬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시편을 연역적으로 읽으면 우린 ‘복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찬양’한다. 이 장엄한 요구에 우리는 화답해야 한다.

 

시적 배경은 포로 후로 추정된다. 시편 148편과 같이 성전에서 불렸다. 오늘 시편은 비교적 짧게 함축되었다. 그럼에도 ‘찬양’이란 표현이 열한 번 반복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찬양할 임무가 주어졌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찬양할 것을 반복해서 요청한 이유다. 시편의 찬양이 우리의 기도다. 우리가 주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4:20).”

 

시적 구성은 1연(1절)에서는 찬양의 장소에 대하여. 2연(2절)은 찬양의 이유에 대하여. 3연(3-5절)은 찬양의 방법에 대하여. 4연(6절)은 찬양할 주체와 찬양 받으실 대상에 대하여 알게 한다.

 

1. 찬양의 장소에 대해서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1) 주의 임재 처소인 성소에서

성소는 오늘 날 교회로 이는 단순히 건물 이상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곧 우리 자신으로까지 확대해서 말이다. 성소는 주의 임재의 장소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행사되는 곳이다. 온 세상을 포함하면서 특정한 장소로 구별되기도 한다.

 

2) 권능의 궁창에서

곧 하나님의 권능이 발휘되는 장소로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포함된다. 유대인은 우리가 순종할 때 ‘하늘의 물은 제 자리를 유지한다’고 여겼다. 불순종하면 큰 물이 쏟아져 홍수와 멸망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시 107:25-26).” 고로 우리는 세상 어디서나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찬양이 중단되면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27).”

 

2. 찬양의 이유에 대하여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150:2).”

 

능하신 행동과 지극히 위대하심은 먼저 ①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불러 세우셨고, 흙으로 빚어 우리 사람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② 지극히 위대하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과 바벨론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세상 악한 권세로부터 구원하셨다. 이렇게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4).”

 

창조역사는 어찌 우리 이해로 감당하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 애굽은 오늘의 세상이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 15).”

 

3. 찬양의 방법에 대하여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5).”

 

찬양에 있어 기도를 비롯하여 우리의 목소리로 주께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몸과 도구를 이용해서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도록 한다. 표현되는 개인적인 언어 곧 기도와 곡조에 따른 노래와 이를 연주하는 악기와 표현하는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은밀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부터 시작하여, 누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하고 격려할 때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다. 춤과 노래 역시 우리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며 악기로 연주하는 것 또한 모든 신체를 통한 찬양이 된다. 주께 향하는 우리의 모든 몸짓과 소리는 찬양이 된다.

 

4. 찬양의 주체와 그 대상에 대하여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히브리어 성경의 교부 제롬(Jerome)은 시편 150편을 읽고, “시편은 끝났다. 여기에는 모두 2,527절이 담겨 있다”고 설명하였다. 시편의 2,527구절 모두는 우리의 삶을 흔적이다. 간절한 부름이고 간곡한 아룀이며 놀라운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다.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을 시편은 하나님께 숨김없이 고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그리하여 모든 “호흡이 있는 자”의 임무이며 권리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매 순간 우리의 기록이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시편을 산다. 그리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우리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아 사는, 호흡이 있는 자로서의 표현들이다. ‘호흡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사람 뿐 아니라 동식물도 포함한다. 모든 자연의 순리는 그에 따라 ‘여호와를 찬양한다.’ 해가 뜨고 달이지고 새가 날고 각종 짐승들이 활개 친다. 계절이 바뀌고, 동식물은 겨울을 대비하고 봄을 기다린다. 모든 피조물은 그 호흡을 다하는 동안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창조주 여호와를 찬양한다.

 

나오는 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우리는 ‘복 있는 자들’로 오늘을 산다.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삶은 비극적이다. 하여 많은 종교들은 ‘낙관주의’로 흘러 ‘신비주의’로까지 이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복 있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셨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누구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고로 우리는 입을 열어 주를 찬송하는 하나로 전도를 한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비극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지혜서들은 우리로 이를 대면하게 한다. 우리는 신비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편은 기도로 이 현실을 찬송한다. 잠언은 살아서 이를 나타낸다. 욥기는 고난당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전도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줄 아는 방법을 알게 한다. 아가서는 고난 가운데서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하여 성경은 고난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와 그의 아들을 구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한다. 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시편 150편을 모두 마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평안을 확신한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 5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