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 149편 / 성도의 모임

전봉석 2023. 10. 13. 13:10

231015 주일

 

시 149편

성도의 모임

 

시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시 149: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시 149: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지난 주일에 우리는 ‘찬양은 폐지하지 못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든 피조물은 이에 복종한다는 것을 살폈다. 오늘은 더욱 적극적으로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3).” 하신다. 창조주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이스라엘은 이를 ‘승리한 군사들의 노래’로 불렀다. 중세시대에도 이 노래는 전쟁에 출정하기에 앞서 승리를 다짐하는 ‘전쟁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절과 5절에 나오는 ‘성도’라는 표현은 ‘경건한 전투요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의 법도를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였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스 1:1).” 바벨론에서 풀려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이에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왔다.

 

오늘 시편은 당연히 찬양 시편이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격하며 찬양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종말론적 승리의 노래다. 시편 여러 곳에서 ‘새 노래’로 찬양하라 한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96:1, 98:1).”

 

이와 같이 오늘 시편은 새로워진 ‘성도들의 노래’다. 바울은 증거 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곧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사명이다. 교회 다니고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성도’는 아니다. 마치 예수를 따랐다고 해서 모두가 제자는 아니듯이… 성도의 심령 안에는 솟아나는 ‘역동적인 찬양’이 있다. 오늘 시편은 이를 거점으로 자기점검을 가능하게 한다.

 

본문이해

 

시적구성은 두 단락이다. 1연(1-4)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됨을 찬송한다. 2연(5-9)은 곧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게 한다. 이에 따라 오늘 시는 뚜렷하게 구별된 ‘성도들의 노래’다. 궁극적으로 승전가를 부를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승리할 성도’들과 ‘도래할 심판’에 대해 살펴보면서 자기점검을 돕겠다.

 

1. 성도에 대하여(1-4)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 성도란?

 

첫째, 시온의 주민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2).”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4).”

 

셋째,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과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저들은 생동감 있게 찬양한다. 패잔병이 승전가를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성도는 늘 ‘새로운 체험’을 가지고 산다. 타성에 젖은 신앙을 경계한다. 같은 타령의 신앙고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생동감 있게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한다. 들어서 알았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며 산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바울 사도의 설명에 따라, 성도란?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b-10).”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성도는 아니다. ‘신자’와 ‘성도’는 다르다. 신자는 ‘믿는 자’이고, 성도는 ‘믿어지는 자’이다. 믿는 자는 자기의지로도 믿는다. 믿어지는 자는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는다. 예수님은 이를 확인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곧 믿음으로 응답은 받을 수 있으나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 앞에 나왔다. 그 필요는 병 고침이었다. 저들은 믿음으로 순종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눅 17:14).” 그러나 예수께로 나와 감사와 찬양으로 경배한 이는 하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즉 자기 필요에 의해 예수를 따랐던 사람이 수두룩했던 것 같이 교회도 그렇듯 기복적인 믿음으로 다니는 자들이 신자다.

 

성도는 앞서 바울의 표현과 같고 또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으로 산다. 성도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그래서 오늘 시편도 묻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이 자유로운 이 시대에 살면서 우린 너무 쉽게 믿는다.

 

※ 성도의 구별법

 

첫째, 항상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가?

둘째, 그 마음이 거룩한 곳을 향하는가?

셋째, 겸손한 자로 소생하고 있는가?

 

※ 신앙의 리트머스종이

 

첫째, 자기를 낮추어 어린아이 같이 낮추는 사람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둘째, 청함을 받았는가?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스스로를 주 앞에서 낮추는 사람’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① 자기를 생각하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② 어떤 결정에 앞서 교회를 우선한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③ 자신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④ 애매하고 희미하나 ‘그때’가 되면 알 것을 믿는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⑤ 모든 것을 오직 감사함으로 드린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곧 도래할 심판에 대하여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시 149:9).”

 

오늘 시편은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5-6).”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한다는 것과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한다는 것과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늘 있다는 것과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다는 것이다. ‘두 날 가진 칼’은 적을 베기도 하지만 자신을 쳐내기도 한다.

 

무슨 의미일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6-38).” 곧 자기 안의 의심, 회의, 갈등도 쳐내야 한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붙드는 게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

 

세상적으로는 이런 게 사기다. 실현되지 않은 일을 두고 ‘실상’처럼 여긴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신자’는 이루어지는 일에 중심을 두고 성도는 그 너머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 하나님은 하시는 일을 감추셨다. 그래서 우린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분명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하신 말씀에 대해 신자는 이 땅의 필요를 우선하나 성도는 장래에 있을 심판과 그 이후 천국에서의 필요를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 하여 예수님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신 말씀도 그러하다. 우린 반드시 죽을 것이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바로 그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주를 찬양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