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도서 2장 /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봉석 2023. 11. 10. 09:51

231112 주일

 

전도서 2장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 2: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전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들어가는 말

 

오늘 지혜자는 여러 시험을 해본다. 본능을 따라 살아보기도 하여, 쾌락의 이면을 발견한다. 탐욕을 억제한다고 하나 그저 심미적일 뿐 실제는 수고의 몫이 허무하다. 결국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의 결론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올바른 판단을 하며 산다고 사나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난 게 없다. 더욱이 세상의 지혜야말로 헛되어서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 이 또한 인생의 경륜과 경험이 지혜를 더할까 하였으나 일평생이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따름이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23).”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6).” 이에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삽질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 곁의 생수를 마실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본문 이해

 

오늘 지혜자는 인생을 우리 의지로 즐길 수 있는가? 하는 데 주목하게 한다. 단락 나누면 첫 단락은, 스스로 쾌락을 즐기며 인생을 산 결국에 대하여(1-11). 둘째 단락은, 지혜자가 우월한 자이나 우매한 자와 일반인 데 대하여(12-17). 셋째 단락은,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게 허무한 것에 대하여(18-23). 그런 뒤 끝으로 하나님의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1.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려다 얻은 결론이 허무하다(1-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솔로몬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시험 삼아’ 즐겨보았다. 그 결과 웃음이 허무하여 미친 짓이고, 추구하였던 희락이 허무할 뿐임을. 그래서 술로 육신을 즐겁게도 해보고, 선을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붙잡아두려 사업도 해보고, 자신을 위해 집도 짓고, 포도원도 일구고, 여러 동산과 과원도 만들고, 각종 과목도 심어보았던 일에 대하여. 그뿐인가?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고,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고, 먼저 예루살렘에 살던 자들보다 소와 양 떼를 더 많이 소유해보기도 하였으나….

 

은금으로 왕이 소유할 수 있는 온갖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쌓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도 많이 두어보았고, 창성하여 자신의 지혜로 자신을 즐겁게 할 거라 여겼던 일에 대하여…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자신의 수고로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다 해보았으나 이는 모두 영구하지 않고 헛되어 마치 바람을 잡는 것 같이 무익하였다.

 

이를 시편이 강조한 바,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39:11, 62:9).” 이 모든 게 헛되고 허무할 뿐이었다. 결국 이 땅의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다는 사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3-14).” 그렇게 우리가 즐기며 어울렸던 것들이 실은 ‘저주의 자식들’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즐기며 사는 삶에 대해 성경의 결론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2. 지혜자가 우월하나 필연적 불행에서는 같이 허무하다(12-17)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

 

솔로몬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뒤에 오는 자는 오래 전의 일들로 같은 죄를 반복할 뿐이었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기는 한데, 지혜자의 눈은 머릿속에 있고, 우매한 자의 눈은 어둠속을 다니는 것 같았다. 확연히 다르나 당하는 결국은 하나여서, 우매한 자가 당한 것을 지혜자도 당하였다. 그러니 지혜가 있다하나 무슨 유익이 있으며 우매한 자라하나 영원하도록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같았다. 후일에는 모두 잊힐 뿐, 결국 이 땅에서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일반이었다.

 

이를 알고 지혜자는 ‘사는 것을 미워하였다.’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아서, 자력으로 해보겠다고 한 만큼 불가능한 일만 가중될 뿐이었다. 이에 성경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면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하는 결과를 내놓았다. 마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오히려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게 더 불행한 일인 것이어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우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세상에 속한 것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지, 모두가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깨닫는다. 그래서 누구는 한 번 사는 인생, 즐길 만큼 즐기면서 살자고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서 죽음 너머의 영생을 바라게 된다. 예수께서 이를 구분하여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곧 자신을 중히 여기며 사는 자의 결국은 영원을 잃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영생의 삶이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3. 죽음으로 모든 게 허무한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18-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런 뒤 저의 결론은 하나다. 자신이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는 것뿐. 왜냐하면 자기 뒤를 이을 자에게 자신의 허물을 남겨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하고 성경은 강조하신다.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누가 알겠나? 솔로몬이 보니까 해 아래에서 자신의 지혜를 다해 수고하는 결과를 후손들이 관리하는 것도 헛되다. 결국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시 49:17).” 누구보다 수고하였으나 해 아래에서 자신이 한 수고에 대해 실망뿐이라. 누군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해 수고해도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자신의 몫을 넘겨주는 게 불합리하다. 솔로몬은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하고 통탄스러워한다.

 

4. 결국에 이르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24-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6).”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②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셨고,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셨다. ③ 죄인들이 모아 쌓은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게 하셨다. 결국 이 땅에서는 지혜자나 우매자나 같이 죽음으로 끝나지만, 인생이란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란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이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오늘 솔로몬의 역설적인 주장은 자신이 살펴본 바, 허망했던 인생의 추구와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생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이를 듣고 깨달으면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나오는 말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1:2, 7).”

 

이는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행복과 즐거움에 있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곧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과 사정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얻는 기쁨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었다(26).

 

이를 세상에 사는 동안의 일로 여기면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겠으나, 우린 이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곧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나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즉 이 땅의 오늘이나 결국이 전부가 아니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