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도서 1장 / 우리 마음의 지혜와 지식

전봉석 2023. 11. 3. 10:26

231105 주일

 

전도서 1장

우리 마음의 지혜와 지식

 

 

전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전 1: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들어가는 말

 

우리 모두 알다시피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누렸으며, 모든 것을 잃은 자이다. 저는 지혜의 사람이었으나 어처구니없게 노년에 이르러는 우상에게 휘둘렸다. 그의 넘치는 지혜가 더 많은 지적 허영을 느껴서일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 결과 선민 이스라엘은 저의 대를 끝으로 분단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민족끼리 싸우며 주변국과 혼돈의 시대를 보내다 멸망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세 번씩이나 불신의 모습을 보였고, 지명하여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였던 온유한 지도자 모세는 불순종의 자리에서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다윗은 처량하게도 다른 남자의 아내를 취하는 죄를 범하였고, 능력의 선지자로 수많은 거짓 선지자를 상대하였던 엘리야는 고작 왕후 이사벨의 위협에 도망쳐서 죽고 싶어 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예수님 외에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없다. 오늘 전도서는 이를 지혜의 왕 솔로몬이 자신의 삶을 회환하며 고난의 통찰을 통해 실제적인 삶에서 지혜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시편을 통해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이 울려 퍼지는 놀라운 신앙을 지나왔다. 욥기에서 아가서까지, 이들 지혜서는 지혜의 특징을 고난의 현장에서 숙성시키고 있다. 결국 감사의 깊이는 고난의 깊이와 비례한다.

 

특히 욥기는 고난의 본질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 삶의 실체는 비극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라고 했다. 욥기는 노골적으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욥의 의로움을 부정한다. 그의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뒤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이 받은 복을 모조리 망가뜨렸다. 재산을 몰수하고, 자녀들을 죽였다. 욥의 건강도 단숨에 거두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즉 욥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욥의 의로움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으로의 의로움이다. 마치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 인정하신 것처럼, 욥은 이를 뒷받침하듯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고난 가운데 고백하고(욥 1:21), 심지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하는 놀라운 신앙을 보이면서 고난을 지나 더 깊은 지혜로 들어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에 시편은 우리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감사와 찬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린 시편을 통해 ‘시편을 살자’고 여러 번 다짐하였다. 인생에서의 고난은 필수다. 그런 가운데 누군 더욱 주를 가까이 하고, 누군 결국 파선하여 주를 배교한다. 실제 고난은 우리 삶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한다.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고난에서 가르쳐준다.

잠언은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격언조로 정의한다. 인생은 그 자체로 고난의 연속이다. 그것을 통해 갈림길이 수없이 많다. 그런 가운데 누군 찬송으로, 누군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됨을 알게 한다. ‘헛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외에 모든 것은 의미 없음’을 말한다. 이는 팔복(마 5:2-10)의 모티브다. 우리로 완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린 하나님의 섭리를 속단할 수 없다. 인생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다. 헛되고 헛되어 비극적이다. 비극적인 것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란다. 고난의 목적은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아가서는 고난 속에서 참 사랑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알려준다.

 

본문이해

 

오늘 본문을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단락(1-11)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헛됨’을 말한다. 그와 같은 헛됨으로 지혜가 열리는 문이다. 두 번째 단락(12-18)은 경험을 토대로 ‘지혜의 실체와 조건’을 보여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첫 단락에서는 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은 소멸되는 것들에 대하여(1-4), ② 그에 따른 변화를 체험하며 사는 것에 대하여(7-9), ③ 우리를 착각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10-11) 말한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①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12-13), ② 그 자체로 수수께끼 같은 삶에 대하여(14-15), ③ 인생의 모순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16), ④ 진리로 확인되는 우리 인생의 잔인함에 대하여(17-18).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한다. 전도서는 표면적으로는 비극적이고 염세적이다. 아가서는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전도서는 지나치게 염세적이다. 아가서는 은밀한 사랑의 관계를 보여준다. 욥기와 시편에서 고난의 의미를 알았다. 전도서와 아가서에서는 인생의 허무함이 하나님의 의도를 명징하게 함을 드러낸다. 인생은 비극적이다. 모든 철학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상대적으로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추지만, 세상은 퇴폐와 쾌락으로 전락시킨다.

 

이 모든 결국은 처음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뤄진 구원의 발단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그래서 다들 먹고 살기가 힘들다.

 

특히 세상을 보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 복락을 즐기는 게 아니다. 안 믿는 자들의 형통함은 우릴 좌절시킨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4-9).” 이런 가운데 전도서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사실을 ‘허무하다’고 되뇐다.

 

1.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11)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우린 이러한 말씀 앞에 할 말을 잃는다. 우리가 아는 상식과 다르다. 세상은 부조리와 악의적인 것들이 성공한다. 가난을 복수로 부자가 되고, 모자람을 필두로 명예와 권세를 틀어쥔다. 자수성가를 이룬 사람들은 자신의 완고함으로 고집스럽다. 희망은 신기루 같아서 10대에 꿈꾸었던 20대와 30대의 낭만은 ‘헬조선’을 선사한다. 청년의 때에 장년을 희망했지만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니 느닷없는 변수가 많다. 저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앙갚음으로 산다.

 

전도서는 그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 하며, 사람은 풀의 이슬 같고 자연의 한낱 미물보다 못하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에 바울은 ‘예수를 아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똥으로 여겼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장 소중하다고 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곧 우리의 헛되고 헛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우린 바란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를 전도서는 역설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정직한 고백으로 전한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그러나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즉 오늘 우리가 ‘헛되다’고 여기는 세상의 이치가 참 진리인 말씀을 깨닫게 한다. 예수를 온전히 바라게 한다.

 

2. 지혜의 실체와 조건(12-18)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4-15).”

 

앞서 살핀 것처럼 첫 단락에서 우린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은 소멸뿐임을(1-4), 그와 같은 헛됨을 통해 변화된 삶을(7-9), 우리의 착각이 고난 중에 수정되는 것을(10-11) 알게 되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에서는 ①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과 다른 현실을(12-13), ② 그 자체로 수수께끼 같은 삶을(14-15), ③ 인생의 모순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16), ④ 진리로 확인할 수 있는 우리 삶의 잔인함을(17-18) 알려준다.

 

특히 13절에서 우리는 지혜의 실체가 고난 가운데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이는 아담이 맞이했던 인생의 비극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죄의 결과로 고난을 필연적으로 하여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로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7).”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의 지혜로는 이를 알 수 없다. 지혜자의 결론은 ‘사람의 지혜’가 비극을 더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그러니 이 얼마나 허무한가?

 

그래서 시인은 주께 구하였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이어서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하여 바울은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 곧 슬픈 일이지만 사람의 지혜로는 그 자체가 비극일 뿐이다.

 

이에 우리의 참 지혜는,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16:19).” 하여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나오는 말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7).”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것이 지혜다. 모든 게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강물 같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지혜를 얻는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오늘 말씀은 우리의 헛됨이 결국 헛된 것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러할 때 우리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므로 우린 전도서를 통해 생의 헛됨을 지혜, 주를 경외함의 참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