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슥 6:1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앞에 두 개의 놋 산이 있다. 눈을 들어 네 병거가 나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섭리를 집행하는 천사들이다. 두 놋 산은 산 같이 변동 없고, 놋 같이 단단한 섭리임을 알게 한다.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 좌소이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 14:4).” 그곳은 우리의 피난처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욜 3:16).”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주께 묻는 심정으로 처한 상황을 말씀 앞에 둔다. 그때의 ‘바람’은 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수종드는 천사를 가리킨다.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간다. 말들이 병거를 메인 것으로 보아 군사 행동을 보이는 것 같다. 흑마의 뒤를 백마가 따른다. 각기 뒤이어 한 시대씩 차지하고 활동한다. 이 말들이 나가는 쪽은 북편 땅과 남편 땅이다. 건장한 말들이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한다. ‘땅에 두루 다님’은 온 땅을 정복하는 기세다.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곧 바벨론을 정복하고 그것은 메대와 바사로 진격한다. 곧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괴롭힌 원수에게 진노하셨다.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슥 1:15).”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하고 신속하시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그에 따른 심판은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도 일러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오늘의 실상도 같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러할 때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는 각기 주어진 영역에서 자리를 지킨다. 오늘 6절,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하는 부분에서 우린 주가 맡기신 본분에 따라 나아감을 생각한다. 내게 주신 바 오늘의 나로 세우신 주의 뜻을 따라가는 길.
어제는 시편 150편을 끝으로 시편을 본문으로 하는 대장정을 마쳤다. 그러면서 당부한 말이 ‘시편을 살자’는 것이었다. 시편은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을 찬양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주를 바람으로 가능하였다. 앞서 욥의 고난을 소개하고 있는 성경의 의도는 고난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로하게 한다. 시편은 그에 따른 지혜로 우리의 슬픔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는 현실로 이끌었다. 잠언은 실제 삶에서의 지혜의 본질을 알게 하고, 전도서는 이를 오히려 즐거워하게 하며, 아가서는 이로써 주를 사랑하게 한다.
시편을 살자는 말, 바울 사도는 이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면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 하여 지혜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2-8).”
곧 모든 게 다 주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어제그제는 많이 아팠고, 나는 내 몸의 몸부림을 이해하였다. 머리로는 주가 이루심을 알고 마음으로는 이에 따르겠는데, 몸에 밴 습관은 이에 맞서 나를 괴롭게 한 것이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복대를 차고 말씀을 전할 때에 알았다. 그럼에도 주가 맡기신 일에 따른다는 것은 내 몸의 저항에서부터 시작이다. 왜 바울은 그쯤 되어 의연했을 것 같은데도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였는가를 알겠다. 오늘도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30여 분을 달려 교회로 오면서 생각했다. 늘 주의 일은 내가 나를 쳐 복종시킬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돌이켜 신대원을 하려 하다 그 해에 떨어지고 내내 그 정도의 거리를 달려 섬기던 교회로 새벽기도를 나가게 하셨다. 그때의 그 새벽을 떠올리면서 주가 새로이 무얼 행하시려는가? 하고 기대와 저항을 느끼며 운전을 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고비 때마다 의지하고 붙들었을 신앙으로, 당시에 어리고 젊었던 시절에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나는 설교 중에 우리 아이들이 느낄 어떤 반감에 대해 이해하고 소망을 갖기를 바랐다. 지금 와 생각하면 나의 부모가 무모하게 나아가던 길을 우리 사남매가 모두 따르고 있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나? 최소한 가장 뒤늦게 돌이켜 억지춘향으로 끌려오듯 오늘에 이른 나의 이 길에서조차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시는 일, 심판에 앞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하심을 알게 하신다. 곧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이를 앞서 알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러 글로나 말로나 전하여 증거하게 하심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주의 보혈을 느끼면 느낄수록 어찌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겠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신 이가 이루실 것이다. 나는 못한다고 하였을 때 나로 할 수 있다 하신 이가 감당하실 것이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그러했다. 내가 주께 돌이키고 바로 그 해 신대원에 붙었더라면 그토록 새벽마다 바랄 수 있었던 간절함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얼결에 신대원을 마치고, 그 사이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가 이루어지면서 그때도 한 번에 목사고시에 합격했으면 몰랐을 것이다. 것도 한 번은 논술에서 한 번은 인성검사로 인해 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안다. 나의 모든 직업이 글쓰기였고 논술을 가르쳤다. 직전에 글방은 논술로 제법 알려졌다. 논술을 통해 수시로 대학을 보내는 일은 물론 편입할 때 거의 당락을 좌우하는 논술도 척척 해내었다. 나는 자신하였던 것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고, 이듬해 새로 도입된 인성검사에서 처음으로 걸러지는 부적격자가 되었다. 당시에 느꼈을 좌절감은 하나님 앞에 퉁명스럽게 반문하게 하였고, 이 길이 맞나? 싶어서 심각하게 우회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때마다 주가 내게 주셨던 확신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것과 전적으로 주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에 승복하게 하였다.
새벽길을 운전하고 오면서 나는 문득 새로이 하나님이 뭔가 도모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충성과 헌신은 연단과 연마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은 능력이다. 주가 더하실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실상은 어리바리하여 늘 되묻기를 ‘이 길이 맞나?’ 싶은 것들로 힘겨워할 때 우린 그만큼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믿음이란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는 숱한 의심으로 주께 묻고 또 묻는 동안 우리는 전진하고 있었다. 때론 더딜지언정 주의 일은 멈추는 법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이를 위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곧 오늘에 이르러는 내가 꿈꾸는 그곳에 나의 주님이 드러나기를. 여러 구상을 하고 어떤 계획을 세운다 해도 궁극적으로 주가 이루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비록 나는 보잘것없으나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놀라운 은혜와 은총 앞에서 더는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어쩔 수 없음은 심리적으로든지 육적으로든지 강한 저항으로 몸이 아프고 불안은 목을 조이는 것 같으나… 그때도 나는 무슨 이유로 그런 대답을 한지 모르겠다. 목사고시 세 번째 면접에서 어떤 목회자를 꿈꾸시는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한 영혼을 귀히 여길 것을 다짐하였다. 어떤 목회를 꿈꿀 정도로 나는 자신도 없이 끌려갔던 모세와 같았다.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불안과 염려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나 아브라함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무모하고 참담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무던히 방주를 짓고 같은 동선을 따라 순종하였을 노아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에게 한 영혼! 저의 상한 심령을 같이한다는 일은 내가 병석에 누워 주의 나라를 바라는 누구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나로 하게 하신 이가 하신다. 그때 나는 무슨 용기로 누구의 임종을 지키고 예배로 저를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배웅할 수 있었을까?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의미가 있다. 실은 저들이 나의 가는 길에 주의 뜻을 따르게 한 천사들이요 주의 영의 바람이었다. 주의 섭리는 이처럼 언제나 나중에서야 선명해진다. 당장은 희미한 안개 속 같다. 하나 그때에 내 곁의 한 영혼, 저로 인해 나는 길을 잃지 않는다. 이게 뭔가? 하고 당혹스러워할 때 방향키를 저 본향을 향해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 91:14).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모자람도 아신다. 엉터리 같아서 그 모양도 쓸모도 사람들 눈엔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는 내게 주가 바라시는 것은 묵묵함이었다. 내가 주를 인정할 때 주는 일하신다. 주가 행하실 때 나는 그저 따를 뿐이라,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어서 참 다행이다. 가진 게 없어서 떳떳하다. 이상하지? 일련의 이사와 그에 따른 모든 상황에서 나는 한 것도 없는데 다들 나로 어렵게 하신다.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가 세우시고 이루시는 일에 묵묵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에 나는 더욱 꿀릴 게 없다. 주가 하시고, 주가 내 앞에 계신다. 고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기를. 실은 예수님도 그러셨던 것을,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그리하여 그 모든 일을 행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오직 주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이에 나 또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2:2).
나는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주께만 아뢴다. 그리고 떼쓰는 아이처럼 주를 바란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12:2-4).
그리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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