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전봉석 2023. 10. 22. 04:50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슥 5:2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하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빨리 두루 돌아다니는 저주’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슥 5:3).” 두루마리의 안팎에 쓰인 것이 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 2:9-10).”

 

이와 같은 두루마리의 환상으로 우린 죄를 경계한다. 이전 다섯 번째까지의 환상이 성전건축에 열심을 다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면 오늘은 심판에 따른 것이다. 도적질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은 죄악에 있어 대표적이다.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된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가 구원을 이뤄야 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는 그 이유가 분명하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

 

고로 우리가 더욱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5-6).”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누구도 구원을 바랄 수 없다. 우린 구원의 은혜에 거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러므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를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셨다. 우린 저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누구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어려움으로 주를 바란다.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이 은총이었고 이를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이와 같은 은혜로 우린 복음을 전파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이로써 누구도 몰랐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불길이 삽시간에 모든 것을 사르듯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슥 5:4).”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알고 두려워할 줄 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시 34:21).

 

앞서도 알았듯 악인은 악의적으로 도적질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 되이 부르며 맹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 주의 이름을 자기 뜻에 맞추어 함부로 들먹거릴 때,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 곧 우린 말씀에 대해서 또한 세상에 있어서도 올바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어 5-11절까지는 일곱 번째 환상으로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19:18).

 

우리가 주의 말씀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결국 어디에 눈길을 두고 사느냐 하는 문제일 텐데,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스스로도 알듯이 마음을 둔 곳에 눈길이 가게 돼 있다. 그러는 동안 죄는 쌓여 심판이 고인다. 그럼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은 무엇일까?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슥 5:7).”

 

에바는 곡식을 되는 말이다. 곡식 되는 말은 죄악을 측량하는 의미다.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곧 ‘그 말속에 한 여인이 앉은 정도’로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마 23:31-32).” 하고 이르신 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하고 물으신다. 오늘 본문은 ‘둥근 납 조각이 들리우는데, 한 여인이 그 에바 가운데 앉아 있다’라고 함은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인이 말 속에 앉았을 정도는 아직 죄악의 관영함이 틈은 있다.

 

오늘 말씀은 여러 번 읽는데도 의미가 선뜻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악한 세력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다. 에바 뚜껑을 납으로 묘사함은 그만큼 무거울 것인데 여인-죄악이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그때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슥 5:8).” 곧 터진 부분을 막아서 ‘학의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그 에바를 시날 땅으로 옮긴다(8-11). 악의 세력이 하나님께 제압당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에도 악은 여전히 우릴 미혹케 한다.

 

예수께서 경고하신 말씀과 같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와 같은 악의 권세가 판을 칠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곧 저들의 결국은 영원한 불이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2:9, 37:20).

 

하여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1).

 

우린 환난 중에 더욱 주를 바란다.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환난으로 오히려 소망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결국 이사를 했다. 유난히 나는 다른 날보다 아팠다. 이사를 다 끝내고서 나는 오후께나 되어 이사한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먼 길을 간 것 같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었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가보다. 죄악에 사로잡힌 마음도 납 뚜껑으로 닫아두었는데도 열고 나오려 하듯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함께 하던 제자들마저 옛 생활로 돌아갔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그런 거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은총이 아니면 구제불능이다. 나의 몸은 저 혼자 힘들어서 유난을 떨었다. 그때에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4).”

 

송구하고 감사한 일인데도 나는 왜 그처럼 어려운 것일까? 이에 본문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고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 21:5).” 주님은 언제나 먼저 찾아오셨고, 내게 늘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5).

 

주가 일어나신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역사하실 것을 알린다. 이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다.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출 9:5).” 우린 이를 알고 주만 바라게 된다. 이는 말씀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곧,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그러므로 오늘 나는 여느 날과 같이 일찍 서둘러 교회로 왔다. 이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