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전봉석 2023. 10. 24. 04:57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슥 7: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 임하신다. 1차 포로귀환 직후 16년이 지나는 동안 성전재건은 중단되었다. B. C. 520년 다리오 왕 2년에 받은 말씀이다. 우리의 금식 기도도 자신의 요구를 채우려는 수단이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슥 7:3).” 여기서 오월은 성전 훼파의 사건을 두고 바벨론에서 애통하며 금식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이제 저들은 귀환하여, 아직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자들로서 그와 같은 금식 여부의 질문을 받는다. 그렇게 묻는 저들은 하나님이 주신 해방의 은혜를 미루며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거기’ 머물면서 금식 문제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곧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보다 규례에 치중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사 58:3).” 곧 스스로의 모습은 회피하면서 형식적으로 행한 자신들의 종교적 행동에서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7-18).”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종교적인 모습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된 모습을 요구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이들은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는 종교적 강박에 사로잡혔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을 금식하고 보란 듯 십일조를 바쳤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제할 때 남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 골방에서 은밀하게 하고,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9).”

 

우린 어쩌면 자기애에 따른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다. 늘 그 내용은 요구와 필요에 따른 것을 구하고, 어떠한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는 강박적으로 이를 지켜 자기만족으로 삼기 일쑤다. 이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곧 지금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는 게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인지를 되묻게 한다. 곧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이와 같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돌아올 수 있는 은혜 가운데서도 저들은 정작 70여 년의 정작 생활에서의 터전을 두고 돌아오기가 망설여졌다. 곧 말씀에 순종은 못하겠고, 몸에 밴 습관대로 행하기는 해야겠는데… 저들에게 주가 물으신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4-5).” 이를 예수님의 표현으로 읽는다면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오월 금식은, 성전 훼파에 따른 것으로, 칠월 금식은,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들이 살해된 사건을 두고 한 것이다.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왕하 25:25).” 그러니 저들은 70년의 포로 생활동안 이 날들을 기점으로 금식하며 마음에 되새겼다. 정작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는 기도이기보다 민족적 비극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잡았던 것이다. 또한 금식을 마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공로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주가 물으신 것이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6).”

 

순종보다 자신의 종교 활동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인들이 있다. 저들은 금식을 공로로 내세운다. 하나님을 향한 통회와 자복의 금식이 아니다. 신앙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예수님께 배운 말씀을 또한 바르게 실천하며 가르쳤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종교성이 아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러므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스스로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래도 될 것 같은 일에서 길을 잃는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신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여러 생각에 눌려 별의 별 궁리를 다하지만….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시 7:9).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2-4).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주께 의뢰하고 겸손히 주를 바란다.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 같아서 어찌 주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9:14).

 

사방이 다 막혀 마음이 어려울 때 가만히 주를 바라는 일은 쉽지 않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것은 형식적으로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등 돌리고 귀를 막아버리면 더는 어쩔 수가 없다.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대하 36:16-17).” 그러했던 저들은 이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데도 여전히 바벨론에 머물며 귀환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두렵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슥 7:13).”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생활로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는 경우에 대하여,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5-26).” 말씀 앞에 앉아 그 내용을 정리하는 동안 나의 여러 마음이 교차하고 생각들이 어수선하다. 내 스스로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얼마나 온전히 믿고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어떤 일에 안달이 나고, 걱정이 앞서 마음만 어지러운데….

 

새로 이사한 동네를 둘러보며 나는 교회를 생각하였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주가 예비하셨음을 믿는다. 늘 그러했던 것 같이 주가 행하실 것이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동생 일이나 나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음을 졸여 바동거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주가 이미 예정하신 결국을 생각하며 주의 뜻을 살피는 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34:15).

 

주께 아뢰고 구한다는 것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써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마치 나는 맡겨놓은 물건을 찾듯이 동네를 살폈다. 늘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힘이 된다. 그래서도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란다. 바람으로 당당하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그러는 마음을 눌러 주 앞에 둔다. 단지 이와 같아서 오늘도 무사히 새벽을 깨우고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말씀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이 요동치는 것을 잠잠히 할 수 있는 것으로 귀하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7, 17).”

 

오늘의 여러 상황은 악할 뿐이어서, 어제는 동생 재판에 따른 고소인 측의 소견서를 읽었다. 무슨 로펌으로 여섯 명의 변호인들이 붙어있었다. 저들은 악의적으로 일을 도모하고 거짓으로 꾸며 사건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사탄의 농간이란 것을 단번에 알 것 같았다. 최소한의 상식으로만 살펴도 자기주장에 따른 거짓 진술뿐인데, 문제로 만들려고 들면 못할 게 무엇이겠나 싶었다. 그러니 마치 골리앗과 어린 다윗의 싸움처럼 불가능하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다윗과 같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는.

 

신앙의 절정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왜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 망설이는지 이해는 간다. 어느덧 일구어 놓은 터전이 바벨론에 있다. 포로로 잡혀간 생활이었기는 하나 거반 인생의 긴 시간을 그곳에서 살아왔다. 그런 저들이 귀환에 합류하지 않고 바벨론에 머물면서 행하던 금식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궁리하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우린 너무 쉽게 자신을 놓아두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1).

 

어느새 있는 듯 없는 듯한 믿음으로 믿는 듯 안 믿는 듯한 생활에 도취되어 사는 경우에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고 있었다. 이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그저 사는 일에 급급할 때 신앙도 우상이 된다. 자신의 종교성이 자신의 믿음을 감퇴시킨다. 그러다 보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이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3).

 

스스로는 선이라 하나 악하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악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렇듯 우린 주 앞에 엎드릴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하여,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4).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저들은 서로 속이고 속아주고 공모한다. 돈이 쏠리고 인맥과 학연이 끌어준다. 시쳇말로 돈 없고 빽 없으면 싸움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를 알면서,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

 

우리가 주의 곁에 있는 게 아니라, 주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온전히 주를 바랄 때,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