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슥 9:16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8, 11
성전 재건이 이뤄지고 약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여전히 이방민의 핍박은 이어지고 번영과 평안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와 그에 따른 의심이 생활을 비트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궁극적인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전하여지고 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그러므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계 18:20).” 이에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이 모든 여건과 상황이 실상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한 과정인 것이다. 오늘 본문 앞부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아람과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곧 종말의 때는 악인들에게 멸망의 자리이고 우리에게는 해방과 승리의 날이다. ‘하드락’과 ‘다메섹’은 수리아에 속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슥 9:1).” 결국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은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당한다.
이에 세상이 주는 교훈은 그 멸망의 경로이다.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2).” 그들의 지혜가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다. 두로와 시돈은 지혜롭기로 유명하다.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겔 28:12).” 그것으로 무역선을 만들고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크게 부강하여졌다. 그 결과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6-17).”
가진 것이 자신을 삼킨다고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슥 9:4).” 이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곧 우리의 지혜는 저들 지혜의 끝을 보고 안다. 결국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19-20).”
마음에 들어 하며 생각했던 곳이 세를 놓지 않고 자신들이 카페를 한다고 했다. 여긴가, 하고 주의 뜻을 살피다 멈칫한 셈이다. 번화가나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으로는 싫은데 주께서 어찌 인도하실지, 잠시 멈춤이 된 셈이다. 오후께 후문 쪽으로 해서 가만히 동네를 둘러보는데 다닥다닥 붙은 어릴 적 단층 주택들이 빼곡하였다. 교회도 많고 사람들도 부산하였다. 주가 그 필요한 곳에 예비하셨을 것으로 알고 묵묵히 살펴보면서 지나쳤다. 그쪽으로는 조만간 철거가 이뤄지고 재건축이 일어날 거라 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지켜 애써 쌓으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허사다. 나는 낡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3절,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아무리 그러했던 것도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4).” 우린 이를 보면서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무엇이 복이고 평안인지를 알겠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그러므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찬양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그런 가운데 교회를 자리 잡는 일은 신중하여서 한 영혼이 돌아오는 데 있어 교회 밖의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내게 두시는 사명을 생각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나는 이와 같은 바울의 심정을 안다. 하등에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자이나 주가 이처럼 세우심이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만 부산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게 어디가 되었든지 주의 뜻을 따름인데, 교회는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뤄간다. 남들은 그러려니 할 테지만 오늘까지 이 교회를 이뤄오면서, 이래서는 어렵겠는데 할 때마다 주가 이루심을 인정한다. 그 무엇도 이를 멈출 수 없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다스리신다. 오늘 말씀도,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슥 9:8).” 나는 실제 이 교회를 통해 주가 일하시는 것을 곁에서 본다. 우리 형편에 교회 월세도 내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록 적은 금액이나 목회자 사례도 충당이 된다.
주가 지키신다는 것,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보다 더 분명한 존재의 이유가 또 있을까?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교회를 이뤄 가는 일에 주체가 된다는 것. 나는 가만히 양지바른 의자에 앉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여러 생각을 흩으며 주가 새롭게 하실 교회만 생각하였다. 아내나 손위처남은 여러 곳을 다녀보고 ‘몫 좋은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무심한 듯 주가 하실 것을 기다린다. 이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125:1-2).
나는 우선 이와 같이 새벽에 일찍 나와 주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 곳으로 한다. 누가 올지, 나는 앞서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다만 주의 재림의 때를 함께 기다리며 맞이할 수 있는 영혼으로 주가 더하실 평강과 구원을 생각한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곧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하여 교회는 주가 책임지신다. 이를 알면서 나의 고질적인 조바심은 사라졌다. 집을 이사하는 일이나 그 일처리들에 있어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주가 막을 건 막으시고 풀리게 하실 건 풀리게 하심을 보면서, 이는 교회를 위함인 것을 안다. 이때 우리의 최고 의지는 ‘평강’이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이런 걸 보면 주가 하시는 일에 대해 안 믿는 자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같이 믿는 자에게는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다. 교회는 다만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이를 알지 못하니까, 부동산에 들어가 얼마에 얼마 정도로 맞춰 장소를 찾고 있다며 이를 교회라 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앞서도 열 평도 안 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알리니까 그야말로 열 명도 앉기 힘들 텐데, 하고 저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굳이 내가 기죽을 건 없다. 현재 확실하게 함께 할 성도는 한 명이고, 나머지는 가족이며, 줌으로나 예배에 참석하는 이가 몇 명이니….
예전 같으면 가능성을 운운하였을 텐데, 더는 그런 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주의 나라를 이뤄간다는 것은 주가 붙이시는 한 영혼으로다. 한 영혼을 홀대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자신의 존재여부 또한 불투명한 것과 같다. 개개인은 모두 ‘한 영혼’이고 구별된 족속으로 개개의 교회이다. 이러한 개체발생이 우선하는 게 교회다. 하지만 교회가 커지고 교인이 많아지면서 개체는 계통을 따르고, 계통은 다수에 의해 묻어가는 경향이 있다.
나는 생각하기를 ‘나의 하나님’이 아니면 ‘너의 하나님’ 혹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분명 야곱은 고백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창 32:9).” 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31:42).” 이는 곧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형제들의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며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심은 사실이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듯 나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나 역시 ‘한 영혼’으로 주 앞에 선다. 나의 이 시간을 우선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한 영혼으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7-18).” 곧 우리 한 영혼 한 영혼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하는 곳이 교회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에 봉착한 여러 불안요소에서 나의 불신을 걸러낸다. 내가 어찌 하려는 나의 의지도 주의한다. 주가 어찌하시려는가, 하는 데 중심을 두고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슥 9:12).” 그러할 때,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16-17).”
이로써 평안하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1-2).
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의지에서 견고한 의뢰가 나온다. 주가 이루실 것으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6-7).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8,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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