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슥 8:2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하나님이 시온을 위해 질투하신다. 그 가운데 거하실 때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 되고, 시온은 성산이 될 것이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슥 8:3).” 열방으로 선민을 구출하고 그들과 복된 관계를 맺으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8).”
후반부에 이르러 바벨론에 남은 벧엘 사람들의 오월, 칠월, 금식 문제에 대한 답변이 나온다(18-23).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의 축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질투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주의 백성을 대적하는 이방민족을 향한 진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2).”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이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그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수 24:19).”
결국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 길은 ‘하나님의 질투’ 가운데서 온전히 주만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삶’이 복이다. 오늘에 이르러 주가 행하시는 일이 항상 새롭고 놀랍다. 가령 어제그제는 아내와 함께 동네를 둘러보며 ‘글방’으로 적당한 자리를 찾아보았다. 작은 평수이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교회’이었다. 남부초등학교 앞쪽으로 맞춤하니 빈곳이 있기는 한데, 어찌할까 하고 주께 맡기며 돌아왔다. 왁자하니 아이들 하교 시간이기도 하였고, 소담하니 그 골목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또한 좋은 것이 아들이 저녁을 같이 먹고 함께 가정예배를 드린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기특하고 고맙다.
우리가 머무는 곳, 그곳이 어디든지 어떠하든지 주가 머무시는 곳이 된다는 것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오늘의 나로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한다는 것.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1-32).” 그러므로 내게 더하시는 날에 충실히 감당한다는 것.
결국 교회는 진리의 성읍이 되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성산이 될 것이다. 어찌하시려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이루시는 일에 주목하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벌써 아이는 5학년이 되었다. 자폐성을 보이는 아이로 모든 학원에서 거부당한 아이다. 부모가 서로 재혼하면서 각각의 장성한 자녀가 있는 가운데 둘 사이에서 뒤늦게 본 늦둥이였다. 위로 형, 누나와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처음 아이가 왔을 때, 아이는 자기 성질대로 하려 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변기에다 똥을 바르거나 엘리베이터에 오줌을 싸기도 했다. 그 일로 관리실에 민원이 들어가고…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 때 온 아이가 어느덧 5학년이 되었는데, 우리가 이사를 하기 몇 개월 전에 아이는 벌써 그쪽으로 이사를 한 뒤였다.
아이를 전학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우리가 이사를 가면서 아이도 그쪽으로 전학하여 공부방으로 오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 우리가 보고 온 자리가 하필 아이가 전학할 학교였고, 우리 집과는 횡단보도를 하나 두고 있었다. 아내는 넌지시 아이를 가르칠 수 있겠나?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요령이 나서 더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입시준비나 성인을 대상으로 할 거라 했는데, 갑자기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이해가 느리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아내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하나님이 어찌하시려는가, 하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잖아도 ‘우리 아픈 아이’는 우리가 이사한 후부터 언제라도 놀러오고 싶어서 좀이 쑤신다. 어제도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몇 번을 카톡을 하였다. 만약에 그 학교 앞에 터를 잡는다면 녀석도 수시로 놀러올 태세다.
다시 또 아이들이라니. 아내는 ‘똥싸개’를 내가 맡아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쳐주면 참 좋겠다고 하면서 추근거렸다. 외면할 만하면 툭, 툭, 건드린다. 아픈 아이! 딸애가 종종 하는 말처럼, 아빤 왜 늘 ‘그런 사람’만 오냐? 할 때 나도 갸우뚱하다 늘 생각이 다다라 멈추는 곳은, 그런 대상이었다. 어릴 때나 주를 멀리하고 살 때도 나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의식하며 노력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보다 혹은 어디 책에서도 ‘그런’ 인물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다라랐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처럼 싫어서 외면하고 시선을 피해도 곁을 보면, 누가 또 우울감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공황이 왔다며 찾곤 하였다. 누군 박사까지 하고 나름 성공가도를 달리는가했더니 마음에 깊은 강박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그런 거보면 내가 그 대상으로 환자인 게 저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동질감을 주는가보다.
어느 소담한 거리의 초등학교 앞에다 주가 세우시려나? 주인하고 연락을 하고 전화를 주겠다는 부동산의 말이 마치 기도해보시고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주세요, 하는 소리로 마음에 남았다. 그런 거 보면 졸업 후 출판사를 서너 해 다닌 게 전부이고, 얼결에 시작한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이 나의 천직이 되었다. 이젠 보다 넓혀 ‘심령이 상한 자들’로 규합되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결과를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는 일이 되었다. 싫은데… 하고 외면하듯 마음은 도리질을 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면!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사 60:14).”
한사코 싫어서 나 또한 나를 부정하듯 세상 쪽으로 달려가며 살았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다. 한동안 저들로 인해 (어느 사단법인협회에서 2년 남짓 기획실장이랍시고 일하면서 나는 저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는 자신들의 권리주장에 환멸을 느끼고 뛰쳐나온 적이 있다.) 더는 나 자신 또한 애써 외면하며 산다고 산 것인데, 왜 이렇게 내 주변으로는 ‘아픈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모르겠다. 마치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 피해있을 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 ‘그런 사람들’로 채우시고 함께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새벽, 운전을 하고 교회로 오면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였다. 어차피 외면하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럴수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질투’는 심화된다. 주의 뜻이면 그게 글방이든지 골방이든지 내게 맡기시는 그곳이 주의 교회이고 성전이 되고 임재의 장소가 될 것을 믿는다. 고로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하긴 이상한 마음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장소 반대쪽으로 주상복합건물이 역전 주변에 난립해있고, 3층과 8층(어제 부동산에서 알려주던 장소로)이 비었는데 현재 여기 정도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장소로도 훨씬 깔끔하고 모든 시설이 다 갖추어져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훨씬 좋고 백배는 편한 곳일 텐데 희한하게 마음이 들어가질 않았다. 오히려 왁자지껄하고 아이들 왕래가 잦은 소담스러운 학교 앞 ‘그 거리’의 누추한 자리가 더 마음이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누가 찾아오기도 어려울 텐데… 나는 혼자 앉아 이상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모르겠다. 주가 이루실 것이지만 나의 마음이 닿는 곳에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남은 것인지.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부여하신 명령이 있는 곳으로 보내실 것임을 잘 안다. 그러므로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6-17).” 주께 맡긴다는 것. 하게 하심도, 누굴 오게 하심도 모두가 주가 하실 일인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에 나의 태도를 생각할 뿐이다. 받아들임으로 주를 인정할 것인지, 발람과 같이 혹시나 하고 다시 또 주의 뜻을 바라지는 않을지. 다만 나의 이제 바람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주가 지켜보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 나 또한 주가 하시는 일을 보는 자이다. 이를 증거하는 것으로 모두가 거절하는 ‘아픈 아이들’이나 상대적으로 마음이 어려워 주 안에서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들’이나… 이를 감당하게 하시려고 나의 그 긴 세월을 ‘아픈 아이’와 ‘그런 사람’으로 여전히 주목하고 계시는가! 아내가 불쑥 말했다. 하나님께도 당신은 아픈 손가락이야. 이번에 새삼 느꼈지만 당신은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야. 그러한 말에 나는 가슴이 저리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하나님은 극적으로 나의 삶에 개입하셨고 주도하셨다. 나는 이쪽인가? 하고 살피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루시고 그 위를 운행하고 계셨다. 곧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을 당신의 진리와 공의로 다스리신다.
오늘 7-8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니 내가 무엇이라고 나에게 이처럼 질투까지 느끼시면서 사랑하시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늘 살면서 ‘아픈 아이’ 혹은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을 때 하나님은 나를 높이셨다. 하긴 나 같은 이가 평생을 누구에게 ‘아저씨’라 불리며 하대하고 무시당한 적 없다. 어떠하든지 늘 ‘선생님’으로 살게 하셨고, ‘목사님’으로 세우셨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누가 ‘목사님’ 하고 부르면 여전히 송구스럽다.
곧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우리가 사는 어디든지 그곳을 예루살렘이 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심을 나는 이제야 고백한다. 내 실력이나 능력으로 살아온 게 아니다. 하는 말이겠지만 어제 부동산 이도 ‘인상이 참 좋으셔서’, ‘자신이 책임지고 찾아보겠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것이 상술이라 하면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으나 나는 내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때에 그 증거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 25:10, 89:14).
나보다 이와 같은 은택으로 사는 자가 또 있을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30:11-12).
오늘 말씀은 이르시길,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b).” 이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5:1).
스스로도 묻게 된다. 그리고 답을 얻어,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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