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경고’를 히브리 원어 ‘맛사’로 해석하면 ‘협박하는 예언’이란 뜻이다. 하나님을 창조자의 칭호로 부를 때는 ‘하늘을 펴신 이’로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주가 누구이신지 알게 한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암 4:13).” 곧 우리의 ‘심령을 지으신 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경고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슥 12:2).” 곧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에서 종종 ‘취하게 하는 음료’로 비유되었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또한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슥 12:3).” 여기서 ‘무거운 돌이 되게’ 함은 그 무거운 돌을 쳐들어 보려는 자가 상처를 입고 말 것을 가리킨다. 즉 예루살렘을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이 해를 당하는 것이다. 이 ‘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이는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단 2:45).” 하는 다니엘의 예언과도 연결되고,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이렇듯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그러므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눅 20:17).” 하시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하는 경고가 되시기도 한다.
곧 우리에게 있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를 오늘 내게 묻고 계신 것 같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하시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하신다. 곧 오늘 우리의 심령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오늘을 살아가는 힘과 용기와 이유와 목적이 하나로 연결되어,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9).” 순종을 배우게 하신다.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본다. 그러므로 기다린다. 교회를 옮기는 일이라 신중해진다. 나의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여긴가, 하고 돌아보면 주가 막으시는 게 느껴진다. 저긴가, 하고 살필 때도 주가 그 길을 열어주셔야 한다. 주가 함께 하실 때 모든 게 자연스럽고 순탄하였다. 나는 서둘지 않으며 동시에 주가 예비하신 곳을 기다린다. 교회는 주의 것이라, 궁극적으로 주가 정하실 것이다. 이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시고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이와 같은 말씀으로 그 의미를 되새긴다.
고로 교회는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3-55).” 이와 같은 승리의 터전이 된다. 교회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다. 오늘 7-9절까지의 말씀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즉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슥 12:7).” 그리고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8).”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나는 새삼 내 안에 이는 여러 감정과 현실적인 문제에서 배우는 게 많다. 주가 이루시는 데 있어 나의 마음이 앞서는 일과 누구에게 의지하려는 것을 하나님은 경계하신다. 즉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 3).”
보다 현실적인 일로 가져오면 사람 마음이 그런 것이겠으나 어디서 도움을 구할까 하고 여러 산을 올려다본다. 여기가 좋은데 싶어 여러 생각을 짜내며 궁리를 하다 그만둔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해 내가 속을 끓이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려할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무리하게 어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곧 주가 행하실 것을 의뢰한다(7, 8).
내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주가 행하실 때 모든 게 가능할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이 오늘까지 인도하셨던 일을 되새겼다. 학부 때나 신대원 때나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말도 안 되는 모든 상황은 현실이 되어 나로 주의 길을 가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때도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이의 도움이 실은 주의 도우심의 손길이었음을 잘 안다. 다들 믿기지 않는 일이나 나는 그 대상으로 주의 은총과 강권하심을 누렸다. 그이는 막무가내로 학부 편입 후 대학원 한 학기 과정, 못해도 매학기 300씩 1500만원은 족히 감당하였다. 그럴 사이도, 그렇게 애쓸 이유도 없었다. 저이는 나의 거절에 ‘하나님께서 맡아두게 하신 것’을 강조하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도 하였다.
늘 나는 별 거 아닌 듯 보잘것없으나 여기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가히 기이하고 놀랍다. 그러고도 결국 또 10년 이상 배회하듯 거부하다 신대원을 할 때도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들이 6학기 동안 서로 경쟁하듯 학비를 내주었던 것이니… 나는 이를 되새길 때마다 신기하다. 그러니 오늘의 기다림은 주의 손길 안에서 평안하다. 주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를 바울 사도의 진술로 읽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기다림은 신앙의 디딤발이다. 서둘지 않는 것은 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곧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사명을 되새김으로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접근한다. 고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나는 같은 동선과 시간을 따라 새벽에 운전을 하고 오면서 주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보니까,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돼도 감사하고, 안 돼도 감사하다. 곧 이 모든 일에서 감사하게 하시려고 오늘의 이 모든 상황에다 나를 두셨다. 그러는 동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하실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에 감격과 회개는 동시에 일어나고, 그리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내 안에 두시는 소망의 근거는 분명하였다. 그래서도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을 겪게 하신다. 이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곧 우리 안의 소망이 어쩌다 내 의지로 뚝딱,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의도적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나는 더욱 주의 뜻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온통 관심이 교회에 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일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4).
주가 행하시는 일이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절묘한지, 나는 그때에 나의 태도를 염려한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이를 위해 자연과 성경을 계시로 주셨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우리로 끊임없이 주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는 마치,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5-6).
이 기운 찬 자연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고,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7-8).
말씀이 나로 말씀 앞에 앉게 하심으로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하실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9-10).
그렇게 나의 하루는 이 묵상의 시간을 축으로 돌아간다. 이를 위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또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곧 오늘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에,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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