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 13:1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 20:4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의미한다. 곧 성령의 은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우리에게 ‘씻는 샘’이 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곧 오늘 본문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하신 데서 오늘 하루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곧,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에 다윗의 족속, 예루살렘 주민으로 ‘열리리라.’ 하시는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즉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그러므로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는 말씀을 붙들게 된다.
죄를 주께 아뢰고 날마다 주 앞에서 정하심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이렇듯 말씀의 연관을 따라 말씀으로 이어가다보면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수시로 이는 우리 안의 우상에 대하여, 이는 거의 본능적인 게 아닌가싶을 정도이다. 주를 바라고 섬기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을 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곧 마음이 심란하다는 것에서 몸의 질병은 덩달아 보챈다. 말씀 앞에 있을 때는 괜찮았던 것이 금세 눈을 돌려 현실을 생각할 때면 어떤 어려움이 우릴 질식하게도 한다. 이때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것이 답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마치 여러 개의 마음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 같다. 괜찮은가 하였다가 마음이 어려웠다가 하면서, 몸은 자꾸 어디가 아프고… 그러니 마음의 문제인지 몸의 문제인지,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었다.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16).” 세상을 분별하는 데도 그렇지만 자신의 여러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같다. 쓸데없는 염려가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몸을 괴롭게 한다. 이것은 동시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곧 거짓을 부끄러워하고 이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 안의 거짓됨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주를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마음은 어지럽다. 오늘 4-5절에서,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더는 선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약을 살면서 우린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됨을 안다.
곧 구약에는 선지자를 통해 이르시던 말씀이 이제는 우리 마음에 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34).” 이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내 안에 어지러운 생각들이 우상이 되어 염려와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세례 요한에서 끝났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11:13).” 곧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이는 그리스도로 완성되었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에 따라 신약을 살면서 여전히 구역에 매여 사는 것도 우상숭배의 하나이다. 누구에게 어떤 예언을 구한다거나 그리 예언하는 일도 스스로가 우상이 되는 것이다.
더는 ‘엘리야와 같이 털옷을 입고 선지자인 체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슥 13:5).” 곧 오늘을 살면서 그리스도에게 직접 속하여 살면서 우린 이미 ‘하나님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이 있다. 그럴 때 선지자를 자처하거나 스스로 나서 예언을 운운하고 계시를 들먹이는 것은 모두가 우상이다. 특히 6절에 나오는 ‘두 팔 사이에 상처’는 당시 이교도들이 거짓된 신에게 예배할 때 스스로를 상처 내어 칼로 자신을 찌르는 것을 뜻한다. 하나 이제 우린 신약을 산다. 회개하고 복음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과거의 미신적인 생각과 마음을 경계하려 하고 기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더 확실한 것을 바라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우릴 괴롭히는 우상숭배이다.
은연중에 이를 바란다. 혹은 스스로 이를 자처한다. 가령 누굴 위해 묵묵히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를 떠벌이며 마치 자신이 ‘들었다, 보았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누구에게 대신 주신 어떤 말씀으로 둔갑시킬 때가 흔하다. 무슨 꿈을 운운하고, 기도하며 들었던 마음을 놓고, 이와 같이 자신을 ‘선지자’로 자처하려는 모든 것은 이단이며 우상숭배이고 이교도적인 행동이다. 시편은 이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하고 묻는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에겐 말씀이 주어졌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119:50).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오늘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기서 ‘내 짝 된 자’는 ‘나의 가장 가까운 자’로 ‘하나님과 일체이신 분’ 곧 그리스도이심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 또 ‘작은 자들’은 우리 자신들로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손을 들어 복 주신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곧 예수, ‘가장 가까운 자’를 치심으로 우리가 흩어졌으나 우릴 위해 하나님이 손을 펴셨다.
이러한 말씀은 깊어서 여러 번 읽고 그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묵상할수록 말씀은 놀라워서 오늘 또 새 힘을 얻는다. 곧 하나님이 나를 어디까지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은 연단을 받는다. 그때에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듣는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이를 성화구원이라 하겠다. 단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일은 그 확신이 굳건하지 못하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스스로의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는 그래서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믿음도 그만큼 많은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가끔은 이 고난의 역설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하고, 간절함으로 주를 더욱 신뢰하게 한다. 내 마음의 어려움이 육신을 괴롭히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나는 주만 바라게 된다. 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 욕심이 앞서는지, 우리 형편에 맞지 않은 곳을 두고 내내 시무룩하였다. 전화로 몇 곳을 알아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마음만 심란하여졌다. 한데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마주 앉으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곧 내가 오늘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에 따른 성과가 아닌 것이다. 어떤 결실로도 아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하면 남는 것은 말씀뿐이다. 더러는 터무니없어하나 말씀으로 증거를 삼을 때 위로가 새 힘이 되어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그 길을 열어 보인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20:1-3).
고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그래서 기도하게 하신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여,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19-20).
말씀을 보내어 나를 고치신다는 말, 나는 이를 붙들고 오늘도 이른 시간에 서둘러 말씀 앞에 앉았다. 우리의 복잡하고 어지러움은 기도할 때를 알린다. 분명 말씀은,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하여,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20:5).
오늘 시편이 축원하는 하루를 의지하고, 나는 굳건하여져서 용기를 가진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까짓 거, 기죽을 것 없다. 주의 교회이고 주의 일이다. 주가 피 값으로 사신 것을 안다. 하면 주가 이루실 것도 당연하다. 내가 마음 졸이며 어떤 이의 고난 속에서 과잉감정에 시달릴 일도 아니다. 이뤄지지 않는 일을 두고 책임을 느낄 것도 아니다. 나는 주 앞에서 배짱부리듯 주가 하게 하셨으니 주가 이루실 것을 당당히 바란다. 신양의 시대는 ‘하나님 앞의 나’로 독대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어쩜 오늘의 갈등과 어려운 마음, 그로 인한 몸의 통증은 하나로 연결된 신호와 같다.
곧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그리하여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이에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5).” 그러하여,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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