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 14:7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여호와께서 아시는 날’ 곧 ‘여호와의 날’을 상상한다. 곧 주의 재림에 있을 환난을 떠올리게 한다. 그날에 주의 백성을 위하여 전쟁하실 것이다. 교회에는 전에 없던 환난이 있을 것을 성경은 알리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이를 생활에서 실감하고 있다.
‘교회’를 이전하려고 마땅한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앞서 한 주인은 기껏 모든 게 다 순조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글방’으로는 그리 좋아하더니 ‘교회’이고 나는 목사라는 사실을 알리자 순간 안색이 달라졌다. 물론 저는 자신이 믿는 종교가 있어서 교회를 배척하는 것이라 그러려니 하였다. 그렇듯 벌써 여러 곳마다 ‘교회’라는 사실에 손을 젓는다. 어제도 한껏 기대하였다가 놀랐다. 새로 단장을 하고 깨끗한 공실로 비워져 있었는데, ‘글방’이라 할 때는 그리 반기더니 교회인 것을 알리자 바로 거절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저의 종교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덴 적이 있다’는 게 중개인의 설명이었다.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면구스러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하실 때 예수님은 이때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하셨는데, 앞서 자신의 종교적인 입장으로 교회를 배척한 것이야 그러려니 해도, 어제는 ‘교회에 덴 적이 있다’는 말이 마음 아팠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에 더욱 답답하다. ‘여호와의 날’ 곧 말세의 때가 가까울수록,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이와 같은 현상이 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있을 것이라는 데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이 많아진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전하였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
곧 오늘 내가 느끼는 새삼스러운 놀람과 두려움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이와 같은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란 데서 마음의 각오가 필요하였다. 늘 나는 호의적이고 친절한 사람들만 만났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내 안에 갇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외면당하거나 미움 받는 경우는 극히 특별한 경우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요즘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놀랍고 송구하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고 환난을 감하실 것을 알리신다. 오늘 본문 모두에 보면,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슥 14:2).” 외면당하고 미움 받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나 동시에 또 ‘끊어지지 아니리라.’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일련의 상황과 현실을 지켜보면서 새삼 놀라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를 싫어하고 불신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제는 볼멘소리로 교회란 말과 예배드린단 말을 하지 말까? 누가 물으면 목사란 것도 알리지 말까? 하고 아내에게 말해보았다. 왜 처음 글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순식간에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만두는 일이 있었는지 확실해졌다. 하긴 그때 한 아이의 엄마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선생님의 종교가 기독교인 것과 선생님이 종교인이 된 것은 엄연히 다르잖아요! 할 때, 나는 ‘종교’와 ‘종교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그건 줄 알았는데 10여 년이 훌쩍 지나서야 분명해졌다. 종교는 개인의 취향이라면 종교인은 그 신념의 차이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부르심을 받은 것과 보내심을 받은 것은 다른 것처럼. 교인과 성도가 다르고, 성도와 제자가 다르듯이 우린 이를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 물론 교회가 더 잘해야 하고 저들 안 믿는 자들에게 본이 돼야 하겠으나그것으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결국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슥 14:3).” '여호와가 나가사' 직접 싸우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8-9).”
주께서 하실 일이다. 조바심 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부동산 중개인도 답답했는지 ‘그런 사실’은 말하지 말고, 글쓰기 교습소로만 알리면 어떨까요? 하고 물었고, 나는 오히려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나 또한 어떻든지 궁리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실해져 교회를 알리고, 교회에서 글쓰기를 하든지 책을 읽든 하는 걸로 말해두었다. 결국 그러다 못하는 것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과 교회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무슨 사명을 운운할 수 있겠나? 분명히 숨길 게 아니었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같은 뜻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결국 이 모든 일이 주께 속하였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날은,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 점점 더 오늘과 같은 경우를 겪게 될 것인데,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그러므로 이러한 날에 우리 믿는 자들은 서로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돼야 한다. 서로가 문안함은 곧 성도들 간의 의지이며 동행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안 믿는 자들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문제다. 우리가 그저 그러려니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동생 목사가 겪고 있는 일이나 오늘 우리 교회가 당하고 있는 수모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이런 일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 주의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는지,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주님은 알고 계신다.
이 모든 게 주께 속한 일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5-27).” 안 믿는 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믿는다고 하면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그러니 내 곁의 ‘성도’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서로 문안하고 주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때를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1-2).”
주의 날, 곧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7-8).”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이라 해도,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그러므로 믿는 자로 산다는 일은 현실이고 부대끼는 일상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4-5).
곧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그날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그러므로 오늘 우린 죽은 자들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때론 우리 자신도 자신으로 인해 흔들리고 힘에 겨울 테지만….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8-9).”
곧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하신 말씀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의 영광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오늘에 거둘 게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일찍 주 앞에 올라와 주의 말씀 앞에 나를 앉힌다. 내가 아는 나는 공연히 시무룩하고 의기소침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다. 교회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48:2-3).
이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21:1-2).
내가 오늘 주께 아뢰는 일, 환난 때에 우리는 승리를 예감한다. 하여,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고로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를. 오늘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서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때에,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21:3-4).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자세를 바로한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이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하실 때에,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21:5,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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