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 1:5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4
선지자 말라기는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실을 변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들을 택하신 사랑이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 놀라운 선택의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이 신앙의 뿌리가 우리의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로 어찌 이처럼 사랑하시는가는 우리도 알 수 없다.
에돔의 교만은 오늘 우리의 실상을 보여준다. 오늘 말씀 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는 것을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하신다. 그리하여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말 1:5).” 하심은 하나님은 선택한 이스라엘 밖에서도 그 위엄을 나타내신다. 그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모든 이방에 대한 주권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아버지’시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 그러므로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권으로 바벨론에서의 1차 포로 귀환(B. C. 537)이 이루어지고 한 세기가 흐르고 444년 3차에 걸친 귀환이 완료됨과 아울러 잃어버린 선민사상을 고취시킨다. 곧 이스라엘은 영적 매너리즘에 빠졌다. 의당 그러려니 하고 이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같이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은 이 같은 것을 싫어하신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1-12).” 또한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이는 단지 특정 교회를 국한지어 말씀하신 게 아니라, 당시 포로귀환 후 저들이 빠져있던 영적상태에 대해, 오늘 우리의 안일한 신앙에 대한 경고다. 경고는 징계와 심판을 수반한다.
오늘 우리에게 지우신 하나님의 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므로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9).”
일련의 상황 속에서 나는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나 해야 할 것이 우선이었다. 주가 행하실 것을 믿으며,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에 따라 나는 말씀을 의지하고 선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나의 곤고함과 연약함으로 주께 아뢴다. 오늘 시편의 찬송처럼,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4).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하소연한들 무슨 유익이 있을까? 그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실을 두고 주를 바란다. 그럴 때 신기하게도 새 힘을 주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약함으로이다. 바울의 놀라운 고백처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가 머무신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이 어려울 때마다 되새긴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어떤 자격을 가지고 주의 부르심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곧 주가 하실 것을 안다. 나는 엉성하고 부족하나,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요즘은 매일 걸어서 동네 좌우를 살피고 있다. 그럼 마치 나의 어릴 적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나 낡고 좁은 거리에서 서로들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어제는 주민자체센터에 들러 신분증 이전 정정을 하는데 왠지 언젠가 내가 있었던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자주 그런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이 나로 이곳에 보내신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그 응답이 경로가 주를 인정하고 높이는 데서 시작한다. 곧 오늘의 여건이 어떠하든지 주의 이름을 우선할 때 주가 이루실 것이다.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고 생각은 점점 더 단순해졌다. 결국,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어느 길을 지나며 예전에 거기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하였을 생각을 더듬기도 한다. 나의 유년은 항상 교회를 중심으로 놓고 모든 관계가 형성되어서 그때 있던 교회 자리에 여전히 어떤 교회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감사하게도 한다. 거리 이름도 바뀌고 여러 부분이 깔끔하게 정비된 것 같으나 곳곳의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때도 있었던 건물을 마주하면 전하고자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도 같다. 낡은 동사무소에 앉아 혹은 어느 학교 앞 감나무 집 단층 건물 앞에 서서 누가 살았던 것을 떠올리고 기웃거려도 본다.
어릴 적 인천으로 개척하면서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일정기간 같이 했던 골목과 건물들은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새삼 주가 나로 다시 이곳으로 보내신 뜻이 무얼까?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다 그만둔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이 내 안에 뜨거웠던 시절, 나는 고등부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고 그때 우리 반이었던 아이가 이제는 중년이 되어 주를 바란다. 한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구원의 감격을 아쉬워한다. 그때 같이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했던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동네가 자꾸 생각을 머물게 만든다.
오늘 13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게 살면서 잊고 지냈던 주의 은혜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언제였을까? 주의 구원을 번거로워하며 한사코 외면하려 하였던 시절이 너무 길었었나? 낡고 초라한 건물들은 새롭게 단장하고 화려하게 올라간 건물들 사이에서 나의 기억을 건드리며 잃어버린 영적 시간을 되새기게 한다. 그럴수록 오늘의 나는 감회가 새롭고 감격스럽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35:9).
하실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자못 공백이 있었고 주를 멀리하며 살았으나 오늘의 나로 새롭게 하심으로, 나는 마치 예전의 시간 속에서 오늘의 예배처소를 찾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러함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2-13).
나의 영적 매너리즘이 나로 너무 먼 길을 돌아오게 하였다. 이를 말해주듯 건물들은 낡았으나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 재개발추진과 보존하려는 이들의 마찰이 마을 곳곳에 험악한 표어로 붙어 있어 어떤 곳은 위기감이 감돌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에 오늘 시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2:2).
하고 주께 엎드린다. 그때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그러할 때 기도로 인내를 배운다. 어제 저녁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하시는 말씀을 가지고 오늘의 내게 전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 하심을 말이다. 주가 행하실 것이다. 주가 나를 위해 모두에게서 버림을 당하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6, 10).
하여 주가 책임지실 것을 붙들고,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주님의 의도를 헤아리고 헤아림으로 주께 더욱 의지한다. 이로써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마음이 어려울 때 동시에 그 안에 답도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 의지하며,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1, 19).
그러할 때,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3).
그리하면,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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