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 2:1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부정하게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책망에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한 경고다. 더욱이 제사장에게 명령하신 목적은 레위와 세운 언약을 항상 존속하게 하려 하심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4).” 레위와 세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2-13).”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이를 오늘 토대로 본문은 이어간다. 곧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느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느냐 하는 문제로, 오늘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곧 이미 저주하셨는데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앞으로 더욱 심해진다’는 뜻이 전해진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때 단번에 다 내리지 않으신다. 참된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 생활은 경건하고 불의한 교훈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화평과 순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필연적인 생활이다. 그런데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이는 우리 생활에서 흔히 드러난다. 가령 어떤 어려움을 앞에 두고도 그럴 수 있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우리를 안일하게 한다.
이에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결국 오늘의 어려움이 우리의 결국을 알려주는 것일 텐데, 죄는 이미 받은 은혜를 퇴색시킨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의 것으로 족하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산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신 28: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
행여 우리의 번성이 우리로 죄를 범하게 한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이 놀랍고도 기이한 현장에 우리 삶이 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8-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그에 따른 오늘의 사명을 돌아보게 된다. 지난주에 이어 예배처소와 글방을 알아보고 있는데, 자주 이상한 경험을 한다. 이럼 어떨까? 하고 우리의 생각과 방식으로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은 막으신다. 그러면서 선명해지는 일은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이다. 뭘 하든지, 어느 자리에서든지 말씀이 드러나고 전파되기를 바라는 데 있어 노골적으로 이를 훼방하는 세력도 있다.
우리는 여건을 두고 생각이 많은데 하나님은 주의 뜻이 온전하게 나타나기를 기다리신다. 그와 같은 때에 나로 붙들게 하시는 것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때로는 마음이란 게 저 혼자 요동치며 조급해도 했다가 무엇을 갈망하기도 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혼자 시무룩해하다,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다,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어제는 아내와 같이 네이버부동산에서 소개된 장소에 갔다 돌아오면서 나는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불쑥 하게 되는 말이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는 거였다. 여긴가 싶으면 이게 아니고, 저긴가 싶으면 저게 아니다. 매번 느끼는 일이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믿는 자가 건물주이면서도 ‘글방’으로는 좋았다가 ‘교회’로 예배드릴 걸 말하면 금세 싫은 내색을 한다. 물론 이런저런 부담이나 부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새삼 들었던 마음이 이래서들 본 교회 건물을 가지려고 그리 애를 쓰는구나 싶었다. 그런 거보면 내가 너무 안이하였다. 너무 편하게 주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시대에 주가 바라시는 교회와 그 사명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 본문 5절 이하로 9절에 이어지기까지, 우리는 그럼에도 바른 진리를 말하고 그리 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그러므로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어디 좋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초라해도 왕래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찾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동네 대부분이 재건축과 개발을 바라면서 어수선하고, 그런 자리는 외지도 음침하기까지 하다. 오죽하니 어제 아내는 17평의 단독자리에 갔다가 줄행랑을 치듯 돌아가자고 했다. 그럴 때 내 안에 드는 생각은 ‘주의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다. 이를 위해서도 내가 나를 가르쳐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말씀을 가슴에 품고,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곧 일련의 일에서 나를 돌아보아 죄를 회개하고 주를 바라며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가 하실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은 여러 어려움에 부딪치며 더욱 단단하여간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5).
할 때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7-10).” 참 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공식처럼 주어진 것이라, 나는 말씀에 의뢰한다. 주께 고한다. 투정부리듯 주가 행하실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오늘에 두신 일로 만족할 때 감사가 나온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없으니까 부요해진다. 처한 상황이 난관이라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그럴 때 신기하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3-6).” 나의 심령으로 하나님 외에 그 가난을 채울 길이 없다. 세상이 어떠하고 사람들이 저러한 것에 대해 애통해한다. 이로써 속상하고 좌절할 것 같은데 온유하여지는 것은 주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기적에 기적을 더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주가 이루실 것을 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10).” 하여 오늘 본문도 그렇고,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7-8).”
마치 요즘은 이혼이 흠이 아니라 여기는데, 그렇듯이 교회를 옮기거나 하나님을 취사선택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데서 우리의 실상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내 안에 두신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두고 주께 간구한다. 더 일찍 눈을 뜨고 더 일찍 서둘러 교회로 온다. 이전하여 가든 안 가든 내가 어디 있든지 그곳이 교회가 되고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임을 확신한다.
어제까지 겪게 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서는 그것이 마땅하여서 오히려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히 알게 한다. 오늘 17절부터 다음 장 3장 6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사람을 통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선언한다. 나는 나를 잘 알아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그러니 우린 얼마나 아둔하고 미련한지,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2-13).” 그러므로 나는 시편 가운데서도 유독 사랑하는 23편을 읊조리며 되뇐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나의 한 날이 유익하고 영원한 날이 변하지 않을 것은,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이를 알고 느끼며 체험하고 사는 일이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고로,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4:15).”
주가 하신다. 주로 행하시게 저를 신뢰하는 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그러므로 내가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일은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이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3).
주가 하실 것이다. 이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도 말이다. 그러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자주 웅얼거린다.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마음이 어렵고 무거운가보다. 그러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그뿐 아니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5).
그러할 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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