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전봉석 2023. 11. 3. 04:53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실제 하나님을 몰라서 모른다고 하기보다 알고 싶지 않아서 되묻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고 묻는 저들을 향해 경고하신다(7). 이에 ‘내 사자’가 ‘길’을 예비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1).” 이는 세례요한으로 주의 길을 준비하며 회개운동을 벌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홀연히 임한’ 주께서 ‘그 전에 임하셨다.’ 곧 저는 ‘언약의 사자’이시며 구원을 성취하시는 중보자시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누구도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로 믿고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하심이 주의 은혜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130:4).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 이는 마치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 3:2).”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이 우리 안에 일어날 때 그의 재림 심판 때 성화는 이루어진다. 이에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6).” 곧 더불어 언약하신 것은 변하지 않는다.
 
 
회개는 은혜다. 은혜 아니면 자복도 없다. 그럼에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 돌이킬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로 돌이키신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7b).” 이를 받고 들을 때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40-41).”
 
 
이에 우리가 드려야 할 것에 대하여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이를 하나님이 받고자 하심은 그 이상으로 부어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곧 이 땅에서의 십일조는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린 늘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선다.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고 스스로를 시험하라고 허용하셨다. 그만큼 주를 인정하는 것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이는 선택의 문제다. 하나님은 제안하셨고 우린 이를 순종할지 순종하지 않을지, 늘 두 장의 선택지를 가지고 서는 일이다. 일련의 여러 상황 속에서 나는 이를 느낀다. 그러할 때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36).” 이와 같이 자명한 말씀 앞에서 나는 주저하지 않기를. 내게 부여하신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주의 뜻에 온전하기를. 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이 땅에서 귀히 쓰는 물질의 저울에 달아보면 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믿음으로 살면서도 십일조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그래서이다. 것도 금액이 커질수록 시험에 들기 십상이다. 이를 쪼개기로 드려 십일조 안에서 후원금과 선교헌금을 임의로 나누는 이들도 많다. 결국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이는 쉽지 않은 일이어서 한 부자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다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결국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고작 얼마쯤의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내 삶을 주께 바친다는 것은 무얼 하든지, 어떤 일에 마음을 두고 있든지, 교회를 위해 주께 향하는 것으로였다. 요즘 나는 예배처소와 주의 일을 하는 데 따른 장소를 알아보느라 오후 한나절을 보낸다. 도로가 혼잡한 길은 걸어서 둘러보고 다닌다. 힘에 부쳐 금세 지치고는 하지만 더 마음이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단지 돈벌이의 일로 여겨 글방으로나 접근하면 모두가 반긴다. 마다할 게 없다. 이어 교회와 예배를 운운하려면 설명이 길어지고, 저들의 안색이 달라진다. 싫은 티가 너무 난다. 믿는다는 자들도 교회를 꺼려한다.
 
 
어제는 하도 속상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좁은 상가 한 귀퉁이라도 대출을 끼고서라도 사고 싶었다. 몇 곳을 돌아보고 들어오면 온 몸이 땀에 젖었고, 마음은 어렵기만하다. 중개인들도 교회나 예배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인데… 나는 괜히 속상해서 주께 달라고 졸랐다. 마땅한 곳이 없으면 그냥 집안 거실에서 예배드릴까도 생각중이다. 까짓것 장소나 건물 따위로 마음 상할 일은 아니다. 생각은 많은데 여의치 않은 형편이라 마음은 상하고 공연히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마음이 곧 새 힘을 얻는 것은, 앞서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하심이다.
 
 
나의 능력과 오늘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께서 행하실 것이다. 결국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 또한 주가 그리하심이고, 할 수 있다 하시는 만큼 주가 더하실 것을 믿는다. 다만 나는 여러 생각으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기를. 행여 나의 궁리와 판단으로 주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를. 이에 필요한 것은 말씀으로였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2).” 주가 그리 말씀하셨으므로 주가 또한 이루실 것이다. 주의 이루심은 안 돼도 된 일이다. 반드시 되게 하실 것이나 우리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도 주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곧,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와 같은 복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주의 뜻으로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그러니까 내가 하려고 할 때 마음도 상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주께 맡길 때 주가 이루실 것을 안다. 소위 나로서는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억지로 심지어 분에 넘치게 또는 여느 편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가 하신다는 것, 이를 인정하기까지 우린 우리도 몰랐던 자신의 아집과 ‘애굽’을 기웃거려 도움을 얻고자 하는 속성이 얼마나 깊숙이 숨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세상의 어떤 결과로 복을 기준으로 삼으려할 때 우린 낙심하고 회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세상의 결국이 영생의 결국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들 돈돈거릴 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늘 보지만 주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오늘의 나로 세우시고 이와 같은 일을 맡기시는 데 있어 나는 돈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에 감격하곤 한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3-4).”
 
 
하물며 교회로 그 사명을 다하고자 함인데,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어떤 결과이든지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이를 믿고 의지하며,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러할 때 오늘 말씀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7-18).”
 
 
그리 행하심을 믿음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1).
 
 
오늘 이 모든 상황도 여건도, 그에 따른 물질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 모두 주의 것으로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하여,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4-6).
 
 
이에,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2-3).
 
 
나의 자세를 염려하며 그 마음에 주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나는 항상 주 앞에 송구하여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하는 것처럼 오늘 나의 모든 일련의 사고와 행함이 주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지금 내가 구할 것은 정직한 마음과 청결한 영으로 주를 바라는 일이다. 그러할 때,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7, 9).
 
 
이에,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8,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