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전봉석 2023. 11. 4. 04:16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4-5
 
 


주가 예비하신 날을 대비해야 한다. 구약의 종결문으로 말라기는 이를 밝히고 있다. 말씀에 대한 순결함은 성도로서 지녀야 할 가장 고귀한 신분이다. 이사를 하고 지난 2주간 교회를 옮겨갈 곳을 찾았다. 처음 나의 생각은 낭만적이었고 기대에 부풀기도 하였다. 혼자 꿈꾸는 교회는 불온하였다. 하루 이틀 시간이 더해지고 둘러보며 그 실태를 확인하면서, 나는 마음이 어려워졌다. 우선은 이른 새벽, 이와 같이 말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아픈 아이’가 찾아올 수 있는 길이어야 했고, 늙으신 장모나 몸이 불편한 이가 이동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했고, 나의 남은 생이 주께 쓰일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를 설명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적당하다는 자리도 그럴 수 없는 이유 하나로 포기하곤 했다. 주가 이루실 일이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던 것 같다. 하루에 한두 곳씩 걸어서 그 주변까지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가장 놀랐던 일은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가는 곳마다 교회가 있었고, 부동산이 있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이 방어책이 되어주는 것을 알았다.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은 섣불리 선택할 수 있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해주었다. 그렇게 2주간을 돌아보다 내려놓았다.
 
이처럼 새벽에도 자유롭게 나아와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아픈 아이가 어지럽지 않게 찾아올 수 있는 곳도 선택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었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한 영혼을 두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너무나 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지키라는 것과 ‘엘리야’의 사역을 감당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변화산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하게 된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3-4).”
 
이제 나에게 말씀과 삶은 하나다. 우리 성도의 기본이고 기준이다. 말씀을 대표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의 사역을 오늘 본문은 토대로 한다. 말씀과 사역은 교회의 사명이고, 목사의 숙명이며 성도로서의 생활이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고로,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 81:13).
 
우리는 살면서 구원을 바란다. 영생의 삶을 꿈꾸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에서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구원은 필요하다. 매순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듯이 구원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앞서 주를 경외함 곧 말씀을 갈망함으로 공의의 해가 떠오르고, 치료의 광선이 비춘다. 그것으로 우리는 주신 삶을 뛰어 달음질한다. 그렇듯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이를 멈출 때 우리의 심장도 멈춘다.
 
이어 오늘 4절,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게 하신다. 할 때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그러므로 우리의 심장이 뛰는 동안은 ‘율법’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교회도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이를 특별주간 동안 목도한 것 같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0-21).” 결국은 순종이다. 내 생각과 달라서 나의 낭만적인 구상은 부끄러운 게 되었으나 그리하여 교회의 소중함을 더욱 알 수 있었다. 교회는 단지 어느 공간도 장소도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였고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이를 꺼려하고 멀리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이 아는 교회는 외형적인 것이어서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놀랍고 속상하고 마음 상했다가 나중에는 뿌듯하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들의 경계가 곧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믿는 자이면서도 자기 건물에 교회를 들이는 일에 인색하였고, 이는 곧 우리가 무얼 놓치고 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였다. 믿는다고 다 산 것은 아니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 17).” 어제도 그렇고, 나는 낮 동안에 겪고 느끼었던 상처 받은 마음이 저녁에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으로 치료되는 것을 느낀다. 낮에 가졌던 의문과 실망과 좌절이 서로 말씀을 읽고 이를 풀어 설명하다가 나의 심령이 위로 받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곧 우리가 구하여 응답 받았다고 하여 훗날에 그 믿음을 보시겠는가?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0-21).” 믿음은 의지도 신념도 아니다. 이상하게 그리 여겨지고, 그것으로 순종하게 되는 어떤 행함이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
 
어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설명하면서 내가 품고 있었던 어떤 난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믿음은 주어진 것이나 행함은 되돌려드리는 것이다. 나는 나의 걸음으로 주변을 살피었고, 단지 ‘그곳’이 아니라, 새벽 제단을 쌓을 수 있는지. 누가 올 수 있는지. 말씀과 기도가 드려질 수 있는지… 이 모든 게 복합돼야 했다. 순종이란 그리 행함이다. 행함이란 그리 사는 일이다. 구원이란 그와 같은 삶을 사느라 늘 빠져드는 것으로부터의 건지심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나를 어루만지며 감싸 안으신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25:6-7).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따르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순종이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 놀라운 고난의 역설을 사랑하기까지,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에 의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소망으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결국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1-2).
 
내 안에 내 원수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원수가 있다. 우리로 주를 멀리하게 하는 것은 모두 원수이다. 그 원수로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여 나의 영혼은 주를 우러러 본다. 이때에 나의 강점은 주를 바라는 것이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3).
 
곧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사는 동안 주를 의뢰한다는 일은 건지심을 받는 것으로 구원은 매순간 주를 의뢰함으로 이뤄지는 역사다. 의뢰는 굳게 믿는 것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믿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우리 믿는 자들의 공통점은 의뢰였다. 하나님을 향한 의뢰는 더딜지라도 기다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오늘 내가 겪는 일을 두고 기억하신다. 그것으로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66:9).
 
고로 나의 마음에 더욱 주의 말씀을 의뢰하여 하나님의 법이 있게 하신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1).
 
이에 정직하고, 속이지 않게 하신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5:6).
 
곧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사 29:20-21).” 그러해서 우린 낙심되고 억울할 때에 더욱 주를 찾는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4-5).
 
이에 성경은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생은 생각보다 잠깐이어서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고 아우성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2-13).” 하여 어려움에 처할 때,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6).
 
하여 다시금 주께 고하며 구하는 것,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7).
 
이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0, 15).
 
그러므로,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0-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