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도서 3장 / 때

전봉석 2023. 11. 24. 12:19

231126 주일

 

전도서 3장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 그러나 우린 그 좋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망가뜨린다. 나이가 들면서 이는 선명해진다. 그래서들 후회가 는다. 그 이유는 불순종 때문이다. 유혹은 매순간 적이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답을 구한다. 동물과 달리 지성과 이성을 추구한지만 최종적으로는 감각이 우선한다.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는 말씀은 의미가 깊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즉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게 주 안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상대를 의식하게 되고, 남의 시선에 좌지우지하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는다. 이는 뱀의 ‘간교함’과 남녀의 ‘벌거벗음’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의 순수함을 앗아간다. 그리고 즉각적인 감정에 빠뜨린다. 결국 우리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한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그래서 오늘도 다들 먹고 사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이는 죄로 인함이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8).” 곧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이를 앎으로 유혹의 영을 경계한다. 사탄이 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고 믿음 안에서 사는 일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스스로 개선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본문이해

 

오늘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알린다. 첫째는 모든 게 다 때가 있다는 것(1-8). 둘째는 우리의 수고는 헛되다는 것(9-10). 셋째는 모든 만물의 기한이 있고, 우리는 영원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고 소망할 수 있다는 것(11-15). 넷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심판뿐임을(16-17). 다섯째는 인생은 동물과 같은 결과이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18-22).

 

첫째, 모든 게 다 때가 있다(1-8)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오늘 말씀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12-13).” 궁극적으로 모든 때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최고를 선택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강조되고 성도는 이를 따른다. 모든 생명은 “날 때가 있고…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2, 8).” 곧 때를 따라 하나님은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신 11:14).” 모든 ‘때’의 주관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죄로 인하여 우린 그 때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임의로 선택하고자 한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극단적이나 ‘때’를 스스로 자행할 때 살인을 하거나 자살을 한다. 또는 ‘때’를 기다리기보다 인위적으로 당기려거나 멀리하려 한다. 날 때도, 죽을 때도, 심을 때도, 거둘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모두 우리는 임의로 주도하려 한다. 그러나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둘째, 죄의 결과로 우리의 수고는 헛되다(9-10)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9-10).

 

다들 어려운 시절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잃어버린 ‘때’를 분별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이에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에 우리는 간구하고 주께 바란다. 우리가 이를 알 때 헛된 수고의 늪에서 허덕이지 않는다.

 

살아보고 알겠다는 인생은 허무할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래서 타종교나 안 믿는 사람들까지 영생을 사모한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16, 21).” 저들의 종교성이 저들의 영혼을 눈멀게 한다. 그래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요즘처럼 자유롭게 온갖 강의나 다양한 정보가 홍수를 이룬 적이 있을까?

 

역사의 모든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늘 지식에 허기져했다.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를 탐구하며 신화와 문화를 사랑하면 보다 나은 인격을 소유할 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처럼 영생을 사모할수록 우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하였는데, 여기서 ‘나’는 지혜를 의인화한 하나님을 지칭한다.

 

셋째, 만물의 기한이 우리로 영생을 사모하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때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11-15)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11).”

 

이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삶을 소중히 여길 때 최악의 결말을 최상의 축복으로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12-13).” 오늘 솔로몬은 이를 밝히고 싶었다. 주신 삶에 만족하고 상대적으로 느끼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떨쳐낼 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명심할 것은 주께 기도하며 바라며 구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즉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기본 전제를 붙들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럼에도 감각적으로 행복과 불행을 추구하면 이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이로써 전쟁과 분쟁이 끝이 나지 않는다. 그렇듯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3).” 이것이 우리의 실체다. 스스로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들 그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기준이 되어 주가 주신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위협한다.

 

넷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최후(16-17)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16).”

 

세상의 정의란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차선책을 찾는데, 그 기준이 저마다 고무줄 같다. 그래서 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설령 세상 법정이 판결하여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우리의 영혼은 아니다. 우린 반드시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전 3:17).” 오늘 전도서는 이를 밝히는데, 우리에겐 대언자가 계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는 우리 죄로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이다. 감히 선포하건대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도 이를 번복하실 수 없다.

 

다섯째,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의 축복(18-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22).”

 

끝으로 우리는 주어진 생을 다하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의 기쁨이 된다.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으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8-10).” 이와 같이 오늘을 사는 동안 주신 한 날의 수고로 감사할 때, 이는 우리가 영원히 누릴 찬송이 되고 경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이처럼 감사로 받으면 오늘 이 한 날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하루가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곧 오늘 우리의 기쁨도 혹은 슬픔도,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 3: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