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3. 11. 11. 04:37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6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주신 삶을 다한다는 것, 이는 모든 생명이 가진 기본자세이겠다. 앞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로 산다는 것은 은혜이다.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로 말할 때 나는 듣기가 부끄러워 할 말을 가렸다. 하물며 누구를 비판한다는 일에 대하여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곧 그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란 말씀 앞에서 마음을 돌이킨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 4).”

 

나는 안 믿는 아이 앞에서 주를 알게 하려는 마음으로 되뇌었다. 어엿한 가장이 되어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는데 너무도 까마득하여 가물거렸다. 여전한 기억과 앞에 앉은 이가 낯설어서 자꾸 말이 겉도는 것 같았다. 서로의 기억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 나는 다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온 터라, 오늘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눈물겨웠다. 저도 나와 같이 믿음의 자리에 들 수 있다면…. 그렇듯 말이 길어졌고, 아이도 퇴근 시간 전에 파주까지 가야하는데 서로가 지체를 하느라 늦어졌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9:7).

 

괜찮겠지, 하고 나섰다가 길에 갇혔다. 순간 어떤 공포가 일면서 나는 아무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상가 앞에 차를 세우고 숨을 고르며 시간을 보았다. 아직 다섯 시도 되기 전인데… 그대로 붙들려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갔다. 나는 기진하여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마치 한 고개 한 고개를 넘어가기가 힘이 들었다. 그때에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아이를 두고 기도하다 나의 남은 날을 두고 기도하였다. 누구에게 지난날의 기억이 고마움으로 다가왔고, 나는 저의 가정이 모두 예수를 영접하기를 바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주 앞에 서로의 시간을 두고 되물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오늘 주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 후에 기도할 것을 요구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앞서 어떤 마음으로 인하여 기도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이를 잘 헤아리고, 이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쳤고 그 모습은 마치 바람에 쓸려가는 듯 사라졌다.

 

오도 가도 못하고 길에 갇혀 떠오르는 생각을 두고 주께 구하였다. 이때에 간구는 나의 바람을, 기도는 중보를, 도고는 하나님의 뜻을 감사는 그럴 수 있는 은혜를 두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때에 나를 위한 중보자가 계시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1, 5).”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어떤 어려움을 두고 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나의 어떤 것을 가지고 아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나로 왜 이와 같은 처지에 두셨는지, 어떤 일이 어쩌자고 내 앞에 놓인 것인지, 아이와의 대화에서 저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때로는 막무가내로 주께 구하고 또 바란다.

 

나는 나의 불안과 공포를 인내한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사랑하기를 갈망한다. 남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나에게는 늘 어려웠다. 때로는 어떤 기억이 여전하여 눈물겹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이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한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아이에게도 이를 들려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겪고 살아야 했던 기억들로 부디 완고하지 않기를. 그럴 수 있는 길은 주께 아뢰고 주가 주신 뜻을 헤아려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곧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1).

 

마치 우리의 하루는 구도자의 것과 같아서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그 증거를 지키고 사는 일로써,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9:2).

 

그러므로 오늘의 나로 사는 일, 때로는 힘에 부치고 억울하기까지 해도 이로써 주를 바라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바로 그 더하심의 은혜가 때로는 불안증으로 또는 옴짝달싹 못하는 공포와 같다 해도, 어느 정도는 그러려니 하는 무던함으로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견딤은,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곧 때로는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말씀으로 의지하고,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상대적으로 서로 부딪치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5-8).”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리하여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이어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이 놀라운 은총에 대해 나는 절박할 때에 더욱 간절하여져 이를 분간하게 된다. 실제 이 일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으로는 알 수 없다.

 

공황과 불안을 가지게 된 아이는 자신이 겪는 증상에 대해 말하였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때, 혹은 패닉이 온 것 같이 정신이 멍해지면서 눈앞이 하얗게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공포에 대하여… 그때마다 저는 왜 이러지? 하며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해요. 저는 말하고도 면구스러운지 피식,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나는 저에게 굳이 ‘왜?’ 하고 되묻지 않기를. 그냥 그 또한 지나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럴 수 있는, 남이 알 수 없는 것이나 그 시간에 나는 평소보다 더 가까이 주를 바라고 느낀다고 말해주었다. 평소 우리가 이와 같은 간절함을 얼마나 소유하며 살 수 있을까? 더해지는 아이의 말에 나는 가급적이면 질문도 덧붙이는 말도 피하면서 온전하게 저의 말을 놓아두려 했다. 그런 가운데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였다.

 

저는 나를 염려하고 나는 저를 염려하나, 우리는 각자의 몫을 감당하며 주어진 삶을 다한다. 그때에 그저 사는 게 전부라면 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하고. 마치 의도적으로 자극을 주듯 아이의 자기변호에 토를 달기는 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주 앞에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는 주를 사랑하는 나의 정도가 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사랑이 간절하려면 그만큼 자신보다 귀히 여기며 사모하는 그것으로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물론 나는 어제와 같이 길에 갇힐 때 두려움을 느낀다. 순간 식은땀이 나고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길이 좀 풀릴 때까지 있으면 될 일이지만, 때론 억울하고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한데 놀랍게도 그와 같은 노여움은 주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도 한다. 그렇게 서너 시간 가까이 아무 것도 못하고 외딴곳에서의 시간에 주를 찾는 일이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기진하여 잠을 청하면서는 일어나지 말아야지 했는데, 저절로 눈이 떠지고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또 새벽길을 달려 주의 말씀 앞에 앉혔다. 이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에 밴 습관이기도 하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습관을 좇아 나는 다시 또 길에 갇힌다 해도 길 위에 선다. 나로 산다는 일은 그와 같아서, 나는 아이에게 그러한 나를 지으시고 그리 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말해주고 싶었다. 아내는 산후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두 아이를 키워내고 있었고, 저는 불안과 공황을 호소하면서도 일을 찾아서 성실하였다. 두 아이 사진을 몇 장 주었는데, 나는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만큼 또 그만큼의 몫으로 생을 이겨가야 하는 일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모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힘에 겹다. 모친은 여전히 두문불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일찍이 가정을 등지고 떠난 부친은 완고하여서 결국 자기 일에 도전을 하게 된 셈인데….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고, 누구는 주를 찬송하고 누구는 더욱 강퍅하여 주를 멀리한다. 누군 이렇고 누군 저런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내가 붙은 근거를 삼는다. 그리하여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예측을 불허한다. 나는 구하나 하나님은 잊을만하면 또 똑같은 상황에서 나를 멈추게 하신다. 물론 그 공포는 죽을 것 같이 나를 통제할 수 없으나 이렇듯 지나고 나면 더욱 확실해진다. 결국 이 땅의 모든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 다만 그것으로 새삼 주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간구와 누구를 생각하면서 주께 기도하게 되는 중보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의 도고를 절박하게 구하는 시간이 되는 것일 테니….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가 필요하시면 그 뜻에 따라 나를 인도하여 주실 것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그리하여 주는 명령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일련의 여러 상황과 누구의 남모를 사연과 나의 말 못할 어려움까지도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비워내고 벗어던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의 순간은 선택의 끈으로 이어져간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곧 두 마음을 다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오늘 나의 열매가 주만을 의뢰하는 것이기를. 그러할 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진짜 두려운 일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정작 믿는다고 믿고 살았는데,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6).” 나는 주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1).

 

내가 그러함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으나 주께서 나를 귀히 여겨주심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때론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만 한데 다시 또 담대히 구하고 바라는 것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

 

할 때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8).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