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전봉석 2023. 11. 13. 04:50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2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8-19

 

 

예수께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 오늘 본문의 첫 내용은 거동을 할 수 없는 이를 주 앞에 데려와 죄 사함을 받는 이야기다. 문득 드는 생각이 주의 일을 할 때, 혹은 주 앞에 나올 때 우린 너무 많은 변명과 핑계를 댄다. 그 이유도 각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오늘 말씀으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믿음의 문제로 이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끄심이 따른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니라서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으나 이에 순종하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하루 중에 매순간이 선택을 요구한다.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기 싫었다. 끙, 하고 돌아누우며 못 이기는 척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몸에 밴 인도하심을 따라 주 앞에 나왔다. 하루씩, 한 걸음씩…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그리 당부한다. 어디가 아프고 그것으로 몸이 저항을 할 때 여기까지만, 하고 나를 이끈다. 늘 나의 하루는 마지막이다. 이를 가지고 주를 바란다.

 

그렇게 사울을 떠나셨고,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하나님을 외면할 때 그의 자리를 비우신다.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시 78:58-60).

 

우리의 문제는 죄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심을 두고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마 9:3).”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예수님은 이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5).” 하고 되물으신다.

 

결국 우리가 주 앞에 나아오는 이유는 죄로 인한 것이다. 어떤 문제, 그러한 상황이 죄를 가리킨다. 이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신앙에서의 중풍은 예사롭지 않다. 이를 바울은 일깨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9).”

 

나의 영혼이 주를 바라는 이유는 나의 의지로 주를 따를 수 없다는 데 있다. 선을 도모하고 의를 이루려 해도 나로 어렵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죄였다. 죄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판단과 생각으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는 주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 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신다(6).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8).”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신다. 온전히 주를 바라지 못할 때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함께 하시지만 이내 거절할 때 주는 떠나신다. 그 일로 ‘마태’를 만나셨다. 저는 세관에 앉아 있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자 마태는 “일어나 따르니라.”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9). 이어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신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앉았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10).

 

우리 안에 이 둘, ‘마태’와 ‘바리새인’이 항상 같이 있다. 즉시로 주를 따르려는 ‘마태’와 사사건건 생각을 발동시켜 문제를 들추려하는 ‘바리새인’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성이 내 안에 있어서 누구를 대할 때나 어떤 문제를 두고 씨름할 때 이는 동시적이다. 즉시 일어나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하기로 행동하기를 미룬 후 여러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에 예수님의 말씀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 곧 스스로 자신은 건강하다, 문제없다 하는 이는 굳이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다. 혹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추구한다.

 

이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주를 영접할 수 있는 힘도 내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로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요즘 주를 믿는 것에서부터 이에 순종하고 따르는 일에서도 ‘하나님께로 난’ 어떤 권능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에 내 안의 ‘마태’와 ‘바리새인’은 충돌한다. 즉시로 따르든지, 토를 달고 어떤 이유로든지 못할 이유를 들고 거부하든지.

 

분명한 사실은 주를 거절할 때 주는 떠나신다. 이를 이르시기도 하였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우리가 애써 붙들 수 있는 영혼은 없다. 곧 우리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안 된다. 결국 그 차이는 확연하여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므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4-5).”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여 몸으로 이를 따른다. 나를 일으켜 새벽에 올라와 주의 전에 두심은 주가 하시는 일이다. 나는 그리 알고 이를 따르는 데 있어 오늘까지, 여기까지… 하는 심정으로 몸의 저항을 뿌리친다. 겨울이 되면서 그런 건지, 자꾸 어디가 아프고 힘들다. 짜증도 자주 난다. 만사가 귀찮기도 하다. 한데 그러한 나의 부족함은 그러지 못하는 이를 불쌍히 여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를 가리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

 

오늘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알리신다. 실제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18).” 하고 절박하게 주를 찾았다. 우선은 믿음으로 달려왔다.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19).” 우리 주님은 자신을 찾을 때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 와중에 또 한 사람의 간절함을 목격하게 된다. 저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20-21).” 참으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발상인 것 같은데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 이는 예수님과 여자만 아는 내밀한 주의 권능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이와 같은 비밀, 하나쯤은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일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 해도 믿지 않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다시 산 자는 안다. 이전에 죽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는 말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가령 어디가 아프다, 할 때 이를 일일이 열거하고 누구에게 말한들… 나조차 나의 약한 육신이 힘에 겨울 따름인데 누군들 이를 알아줄까? 늘 같이 하는 아내에게조차 이를 말로 하여 오히려 서운하고 상처로 다가올 때가 있다. 또 아프고, 늘 아픈 것은 일상이라 말을 하여 오히려 서러울 따름이다. 어깨 아프고 팔이 점점 힘들어서 글을 쓰기 어렵다. 허리가 아프고 걷는 게 무리가 되어 어딜 같이 가는 게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고 어떤 계획을 세우는 일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는 하다. 가령 어디 가까운데 괜찮은 장소가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부수적인 부담이 따른다. 앞을 보고 일을 추진할지, 말지,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 주께로 그 일을 미룬다. 다만 구할 뿐이다. 나로 주의 일에 적합하시면 할 수 있게 하실 것이고, 그만하면 됐다 싶으면 그만하게 하실 것이고… 나의 이 말에 아내는 답답해하지만 나는 당장 내 몸의 여의치 못함을 두고, 그것으로 절박할 뿐이다.

 

혈루증 앓는 여자의 심정이 그러한 게 아닐까?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겠나? 벌써 여러 해 그와 같은 고통으로 혼자 외로워하였던 그녀로서는 믿음으로밖에 주 앞에 올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주의 옷자락이라도 붙들었다. 이를 아신다. 우리 주님은 이를 알지 못하실 리 없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아, 이때 저 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듯….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8-10).”

 

오늘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의 일이다. 이 놀라운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 앞에 엎드릴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종종 어떤 어려움으로 실의에 빠지고 의기소침해질 때면 이미 죽어 마땅하였을 나의 죄 된 시간을 생각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나는 전적으로 주가 하셔야 한다고 알고 있다. 믿음도 구원도, 선택도 행함도… 주가 아니시면 나는 그야말로 내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라, 조용히 주의 옷자락만 붙들 때,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실 때의 감격이란…!

 

이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 이루어진다(30). 죽었던 소녀는 자는 것이었고, 앞을 못 보던 이는 멀쩡하였다. 예수를 보고 주께 그 몸과 마음을 맡겼을 때,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이 놀라운 역사로 우리는 산다. ‘바리새인’들이야 늘 그렇듯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34). 저들은 그리 판단하고 선동하는 게 일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35).” 오늘도 주님은 주의 일을 하실 따름이다.

 

우리 신앙의 묵묵함이란 그와 같아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와 같은 앎으로 오늘도 내 안의 ‘마태’와 ‘혈루증 앓는 여자’와 ‘죽은 소녀’ 혹은 ‘눈을 뜬 소경’이나 ‘자리를 들고 간 중풍병자’가 주를 찾고 구하여 주의 길을 가게 한다. 이때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1-2).

 

오늘 시편은 앞서 그 시적배경을 알 때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곧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 하는데 어떻게 저런 찬송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는 저도 앞서 주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몸으로 알게 된 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텐데,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4).

 

이와 같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에 있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6).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8-9).

 

그러할 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8-19).

 

이 놀라운 고백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합창이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