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전봉석 2023. 11. 15. 04:42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5-6

 

 

헤롯 안디바는 이복형제인 헤롯 빌립의 아내, 곧 자신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을 하였다. 세례요한은 이를 책망하다 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막 6:17).” 자신의 처지가 그래서 생각이 많았을까? 들리는 바, 예수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여 저는 묻는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앞서 요한은 예수를 알았고 믿었고 고백하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어떤 일, 우리가 겪는 상황에서 우리 안에 드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다. 이 길이 맞나? 주의 뜻이 무엇일까? 내가 지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은 저 혼자 사람을 들들 볶는다. 그러할 때 예수님의 대답이시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곧 나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가지 못하던 길을 간다. 더는 소망이 없는 죄에서 깨끗하여졌고, 못 듣던 것을 듣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가시적으로 내세울 게 없으나 나는 분명 달라졌다.

 

이와 같은 말씀을 내 것으로 들을 때, 아직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세례요한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이 그토록 주의 길을 예비하고 심지어 옥에 갇혀 있는데도 어찌 구해주지 않으시는지… 교회를 이루고자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더 나은 삶을 열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는…, 보면 내 곁의 여럿 믿음의 사람이 겪는 현실이 요한의 처지와 같다. 돌이켜 주의 길을 가면서 나름 주의 뜻을 따라 살면서 헌신하고 수고하였는데 왜 늘 번번이 삶은 이러할까? 다들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토록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누가 그리 물을 때도 나는 저에게 해줄 말이 없어 쭈뼛거리기 일쑤다.

 

어제는 집 근처 어디 가까운 곳을 돌아보다 어느 큰 교회를 가보았다. 건물은 웅장하였고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과 벽은 위용이 넘쳤다. 예배당을 위층으로 올려 일층인데도 내부는 어둑하였다. 평일이라 실내등을 켜지 않아 그렇기는 하겠지만… 조용히 둘러보고 나오다 십여 평 작은 규모의 양지바른 곳에 교인들이 교제 마치고 차를 나누는 자리인지, 테이블이 서너 개 놓였고 화분이 몇 개 볕을 쬐고 있었다. 무심히 드는 생각이었지만 우리 교회는 이만한 자리여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고작 열 평 남짓한 예배처소를 구하기도 이렇듯 어려운데 넓고 크고 웅장한 규모에 마음은 괜히 서글픈 것도 같았다.

 

그러자 오늘 예수께서 이르신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 그렇듯 가끔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어 마음만 어려울 때도 있다. 일련의 나의 사정도 그렇지만 누구는 주의 일에 전심을 다해 일생에 모은 것을 주의 뜻에 합하게 사용한다고 한 것인데 오히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누구는 일생을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를 세우고자 모든 걸 다 바쳤는데 여전히 그 어려움은 고역이다. 어느 친구의 표현처럼 주를 가까이 하고 더 잘 믿고 싶어 하면 할수록 사는 건 왜 더 어려워지는가? 하는 데 따른 답을 나는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은 일러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를 우린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돈이 돈을 버는 경제논리와 다를 게 없이 큰 교회가 점점 더 커지는 것으로 주의 영광을 가늠할 수 있을까? 나는 저 큰 교회를 가만히 둘러보고 엄청난 규모의 주차장을 돌아서 집으로 왔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요즘은 자주 의기소침해진다. 그래서인지 자꾸 어디가 아프고, 늘 같은 타령이라 나 자신조차도 이러한 형편에 만족함을 누릴 수가 없다. 이때에 예수께서 물으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7-9).”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처음에 감사하였던 것들… 그저 돌이켜 죽었던 영혼이 주를 바라며, 듣고 보는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과 같이 모든 게 다 감사하기만 했고 송구스럽기만 하였는데… 나는 지금 무얼 바라며 주께 시무룩한 것일까? 다른 교회나 어떤 목회를 꿈꾸며 누굴 부러워하지 않았고 무얼 목표로 삼은 것도 아니라지만 괜히 기죽고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 어쩌면 나도 여전히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내게 말씀은 일갈하신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나는 누구의 고민을 들으며 같이 입을 삐쭉거리며 마음은 어렵다. 물론 규범적인 말이나 권면도 할 수 있다. 성경 어디를 들고 말해줄 수 있는 정답도 안다. 그러니 나는 그 말씀과 권면에 위로 받고 있는지? 우리 앞의 곤고한 상황은 섣불리 위로할 수 없게 한다. 다만 말씀은 끊임없이 “…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그렇듯 나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나만큼 주의 선명한 도우심과 위로와 분에 넘치는 은혜로 산 자가 누구인가?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그리하여 오늘도 이와 같이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신 것을 안다. 아내는 요즘 하루가 너무 금방 간다며 하는 일도 없이 허무하기만 하다하는데, 그러한 하루 가운데 나의 이 시간과 저녁에 늙으신 장모와 마주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이 과분할 정도로 귀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야말로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나 이와 같은 사소함으로도 오늘의 나를 거동하게 하시며 함께 하시는 은총이었으니… 역설적이지만 수시로 드는 회의와 갈등이 작고 사소한 것으로 감사하게 한다. 이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어지는 오늘 말씀에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곧 오늘의 어떤 성과나 결과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빼앗는 일일 테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 나로 이와 같은 말씀에서 나를 향하신 말씀으로가 귀할 따름이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

 

분명 저 웅장한 성과와 부흥이 주가 베푸신 권능인 것은 사실일 테고, 그러하다면 과연 ‘두로와 시돈’보다는 나은가? 두로는 섬나라였다. 시돈은 레바논 베이트루트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오늘의 수르이다. 두로와 시돈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 이세벨이 아합의 아내로 들어오면서 저들 우상을 끌어들였다. 고라신은 나무가 많다는 뜻이고 가버나움 북쪽 3Km에 위치하였다. 벳세다는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요단강 인근의 비옥한 땅이었다. 예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던 곳이다. 두로와 시돈은 우상의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하였다.

 

우린 천국을 예비하러 산다. 요한은 그리 산 자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저의 생애는 오늘 우리 삶의 지표이다. 고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 4:12).”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오늘 나의 수고,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저 광야에서 흩어질 뿐이라 해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시 16:8-10).

 

오늘도 말씀 앞에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매순간 드는 회의와 갈등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 내가 이처럼 주의 뜻을 바라고 교회를 두고 마음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것만으로도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할 수 없는, ‘아버지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일이겠다.

 

하여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아, 이 놀라운 감격으로 주를 바랄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마치 이는 괜찮다, 다 괜찮다 하시며 나를 어르며 안아 주시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89:16-18).

 

내게 속한 성과나 결과가 아니다. 좀 더 염치없게 말하면 어떠하다 해도 주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다고 하실 것이다. 이는 나를 그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르신 이가 나의 연약함 가운데 거하시며 나로 주만 바라게 하시는 놀라운 주의 권능으로 내 안에 계심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하실 때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36:5-6).

 

이를 알게 하는 것이 나의 실망과 실의와 낙심 가운데서였으니, 나로 그리하게 하심도 주의 뜻이었다. 그것으로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겔 18:31).” 이는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이를 묵상할 때에 같은 목소리로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7, 9).

 

고로,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