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 12:50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가만있지 못하게 한다. 앉거나 서지 못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곧 오늘의 상황은 우리로 그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결국 이는 하나님이 뜻하신 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오늘 시편의 말씀이 과녁을 뚫는 것 같다. 우리 안에 어떤 어려움이 마음을 상하게 하여 냉소적으로 사람을 흔들지만 우리의 믿음이 말씀을 따라가게 한다. 우리는 주의 날을 산다. 매일 매순간이 안식일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우리는 전진한다. 그럴 때 우리 안의 냉소적인 생각은 분쟁하게 한다. 스스로 분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 12:19).”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곧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20-21).”
오늘 나로 주를 바라게 하는 힘, 우리가 지켜야 할 유일한 것은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다. 가만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어제의 내가 아닌 자로 살게 한다. 고로 지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 10).” 오늘 이 모든 상황이 주의 뜻 안에서의 일이면,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고 묻는다(9).
여러 마음이 서로 다투어서 내 안에 이는 분쟁으로는 나로 주 앞에 바로 세울 수 없다. 하여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곧 우리 안의 여러 생각이 우리로 주저하게 하고 돌아가게 하거나 멈춰 서게도 한다. 이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것뿐. 이를 위해 바울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나의 하루는 일찍 시작하여 길다. 가장 좋은 이 시간을 두고 모든 한 날이 구심점을 삼는다. 우리가 주의 때를 알려하기보다 주신 상황에서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은 주를 인정함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그렇게 나는 생각의 가지치기를 한다.
생각은 우후죽순(雨後竹筍) 같이 자란다. 누가 뭐라 하면 혹, 하고 어떤 이의 참견에 멈짓, 하기도 한다. 이때에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함에 대하여 시편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9:10, 119:97).
곧 내가 이 시간을 하루의 중심에 두고 사는 것은 좌우로 따르는 여러 생각이 나를 쥐고 흔들 때도 다시 말씀으로 온전하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한 날의 수고가 때로는 힘에 겨울 때도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전 7:19).”
흔들릴 수는 있으나 뿌리가 뽑히지는 않고 망설이며 머뭇거릴 수는 있으나 멈추지는 않게 한다. 이는 우리 안에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곧 ‘죽기까지’ 하나님을 확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이에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우리로 무엇을 바라고 누구 안에 거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신다. 곧 우리가 주와 함께 함은 상대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나로 교회를 두고 마음을 다하게 하시는 것도 그 이유이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이 이루시는 역사의 현장에 서는 일이다. 무심히 마음은 저 혼자 어려울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고 외치신다.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하고 나를 이끄신다. 고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이에 오늘 시편으로 나의 마을 붙들면,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7:1-2).
세상은 그런 것이어서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잠 14:22).” 곧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이에 따른 말씀을 붙들고 간다. 내가 아직 여력이 될 때, 스스로 몸을 움직여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주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는 나로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게 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 시편은 그래서 더욱 나를 붙드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37:3).
주의 성실하심은 곧 오늘의 나로 있기까지 인도하신 그 증거를 되새기면 분명해진다. 그럴 때 기쁨의 방향도 한결같아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4-6).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을 때가 복이었다. 곁길로 가는 사람을 볼 때 저 또한 ‘예전에는’ 교회를 다녔고 하나님을 믿었었다는 말에 저의 완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도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하여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을 대할 때면 어떤 벽을 마주하고 서는 일 같다.
그때에 나의 자세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상대하여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다. 내 안에 이는 나의 속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 게 아닐까? 결국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곧 나로 주 앞에 붙들어 세우는 것은 말씀으로였다. 말씀 앞에 서게 하는 힘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였다. 곧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하여 나의 천함과 멸시 받음을 존중한다. 내 안의 어떤 어려움으로 나는 주만 의지한다. 내가 주를 의지할 때 어김없이 떠올리는 생각의 순서는 예전에 나로 주 없이 살던 때를 생각하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나는 어떠했었는지, 오늘의 나는 어떠한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7-28).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일은 상대적으로 악을 떠나는 일로 내 안에 ‘스스로 분쟁하는 마음’을 거둬내는 일이다. 순간 일삼는 의기소침함과 자격지심과 방종과 태만을 들어낼 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1).
주가 이루신다는 것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32).
이는 내가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한다는 것인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신앙을 붙들고 사는 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나는 누구인가 하는 관점을 분명히 하여,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37:39-4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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