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30-31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시 35:12-13
우리로 세상 가운데 있게 하신다. 보내시기 위해 부르셨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시작된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예수님의 공생애는 제자들을 세우시는 일로 시작하여 저들을 보내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보내실 때에 저들을 ‘사도’라 칭하신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사도란 ‘내가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하는 의미다(2). 이에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시는 말씀이 이어진다(5). 마치 모세를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실 때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하셨던 것과 같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보내심을 받는 것도 마땅하다. 여전히 부르신 자리에 있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부르신 데서 보내심은 내 곁의 가족에게 혹은 직장에서 늘 가까이 위하고 살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하게 하신다. 이때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9-10).” 우리의 걸음은 가볍고 어깨는 자유롭다. 이는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1-13).”
곧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손길에 대하여 크게 부담을 가질 게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나를 보고 주는 것이면 그것도 문제이고, 이를 받으면서 내가 부채감을 느낀다면 이것도 문제이다. 주는 이나 받는 이나 주의 이름으로 주께 그 마음을 두는 것이 옳다. 이를 나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알았다. 자주 언급하곤 하지만 특히 어떤 이와는 내가 크게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할 정도로 저가 강권하였고, 나는 극구 사양하다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더해주는 것으로 학부를 마쳤다. 그땐 그렇게 부담스럽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그때 저가 했던 말이 ‘하나님이 잠시 내게 맡기신 것을 전달하는 것뿐’이라 하였고 나는 그 의미를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마땅히 그에 따른 더하심과 후히 주시는 손길을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하신 은사도 역시 같다. 내가 누구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나은 것으로, 못한 것이 있으면 못한 것으로 주의 일에 합당하게 하셨다. 이를 마치 무슨 빚 갚듯이 되갚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가령 어제 오전에 친구가 전화를 하여 ‘다니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어느 연예인이 나와 간증을 했던 모양이다. 저의 남다른 체험과 실천을 듣고 친구는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이다. 말인즉 누군 그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저의 그와 같은 느낌이 나는 감사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저마다의 특수성이 있고 개별적인 사역에 있어, 간증한 이의 남다른 체험과 오늘의 실천을 일반화할 수 없다. 더욱이 연예인이라는 특별함을 감안할 때 저가 몇 명을 전도하고, 어떻게 성경을 읽고, 그 가정에 어떤 변화를 목격했는지… 하는 데 따른 것들은 전적으로 저의 은사고 그에 따른 책임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저는 또한 죽었다 깨어나고 친구처럼 주를 따를 수는 없다. 열두 명의 제자가 사도로 보내심을 받을 때 저마다의 은사는 각각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주의 일이다. 더욱이 보이는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삶은 일정 부분은 과장되고 덧대어질 수 있다. 스스로의 ‘그런 것’에 도취되면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만의 헌신과 수고로 이를 자랑할 수 있다.
거실 한 가운데 십자가를 걸고 그 아래 뭔가 제단을 쌓고, 나름은 경건하게 꾸며 그 삶으로 경건을 도모하려는 마음은 이해하겠다는데, 자칫 그것으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스스로의 헌신과 노력으로 주 앞에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어느 훗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경고 가운데 ‘스스로의 삽질에 따른 경고’를 자주 되새긴다. 곧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보자, 이를 앞서 누구의 간증과 또는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연결 지을 때 ‘나는 말이야…’ 하는 식의 내세우는 성과는 두려운 일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스스로 자부하고 열심을 다했으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정작 많은 사람들은 저를 우러르며 남다른 저의 열심을 인정할지 모르겠으나, 주님은 저를 알지 못하신다니! 하여 지혜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게’라는 말은 안 하니만 못한,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하는 예수님의 탄식과 같이 들린다.
마치 천국을 들어가는 데 따른 값을 물어야 하고 갚아야 할 은혜로 여긴다면 그게 어디 은혜이겠나? 졸지에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값을 정하여 되갚으려 할 때 ‘자기 의’가 우상이 된다. 그러므로 지혜서는 덧붙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궁극적으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것이 설령 외형적로는 실패의 자리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복이다.
은사는 달라서 누가 누구의 것을 두고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하나님은 결코 잘난 데서 좋은 성과를 기대하시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곧 우리의 잘됨이나 잘남이 자칫 우리를 허망하게 한다.
하나님은 먼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마 10:5-6),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자 하신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6).” 이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2).” 이를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19-20).” 말씀은 오늘도 부르심을 받은 자로 저를 보내시길 원하신다. 맡은 바, 주어진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산다는 일. 우리가 주로 목마르고, 주의 은총으로 갈급함을 느끼면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누가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다 먹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자신을 상태나 그 지경을 두고 부끄러워하며 말하였다. 나는 저에게 누구보다 건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것, 마침 친구는 전도서를 읽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왜 천하의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고 인생을 규정하는지 알 수 없다고 물었을 때도 그리 말해주었다. 우리가 주를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주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자신의 헛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마치 사랑도 같아서 ‘네가 아니면 안 되겠는’ 이는 다시 말해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사랑은 그와 같이 자신을 부정함으로 사랑의 대상을 절실히 바란다. 그와 같아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히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없는 나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찬송도 영광도 갈망함도 나온다.
곧 그렇게 우리 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고로 ‘나의 예수’가 필요한 곳에 나를 보냈고 그 삶이 곧 사역이었다. 오늘 시편의 놀라운 고백처럼,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35:11-13).
다시 말해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을 두고 주께 기도하게 하신다. 그 기도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르시길,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의 사명은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26-27).”
곧 우리에게 주신 삶을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 이에 따른 남다름을 저들로 알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두려워할 게 없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29).” 하물며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주를 인정함으로, 나의 목숨까지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그러할 때,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5:1-2).
우린 주께 요청한다. 곧 우리의 기도가 놀라운 것은 기도함일 뿐이었는데,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9-10).
이에,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7-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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