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전봉석 2023. 11. 29. 05: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이때의 기다림은 막연하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여 ‘등’을 밝힌다. 등은 우리의 삶으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그러므로 기름은 우리의 선을 돋우며 그에 따른 힘이다. 그러니까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20).”

 

우리가 선을 구하는 데 있어 가장 쉬운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보람으로 하는 것이고, 이어 자기만족으로 이를 구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올바른 준비에 따른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 신앙의 내면적인 거룩함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곧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 나 또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는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9-10).” 모든 게 주의 뜻에 따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5-36).”

 

우리에게 맡기신 바 그 사명이 있음을 안다. 이때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여기서 문득 드는 생각이 버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내가 애써 무엇을 이루려하기보다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께 맡기려는 것,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어제부터는 저녁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교습소로 신고할지 교회로 등록할지를 두고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나는 교회 등록을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할 서류도 많았고, 새삼 처음 시작할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데서 초조함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붙드시는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였다. 어떻게 이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소소하지만 교회 소속 단체의 회비에서부터 다달이 나가야 할 금액이 올라갔다. 늘 그렇듯 우리의 상태는 그대로인데 모든 게 다 오르는 셈이어서…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을 잡고 버틴다는 것.

 

들리는 소리마다 교회들이 빚에 쪼들리며 성도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무리한 건축이 가장 큰 원인이고 새로운 사업(사역?)을 구상하여 추진하다 돈만 들어가는 경우였다. 그런 거보면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매달 또한 채워지고 모자람이 없는 것이 놀라웠다. 늘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즉 이 일이 내가 하는 일이면 뭐라도 하여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목표로 하겠는데, 나의 기다림은 ‘등’도 중요하지만 ‘기름’이 더 필요하였다. 이는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행여 내 안에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나는 의도적으로 주가 하실 것을 되뇐다.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든지, 새로운 누구에게 말씀을 전하며 저의 상한 영혼으로 씨름하게 되든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게 하시는 이가 또한 행하실 것을 안다.

 

그러므로 혼자 가만히 기다림으로 족한 사역도 있다. 남과 견주어 뭔가를 꼭 해야 한다는 강박은 주인이 어려운 사람이라 그가 받은 달란트를 숨겨두고 있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다. 그럼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는 저들에게 맡기신 각각의 몫이 다른 것이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남기지 않았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행하지 않았다. 곧 주가 맡기신 바,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는 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완고함이란 마치 그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자신의 이상과 현실을 고집하는 일이다.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등을 밝히되 기름도 준비하는 것으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 마치 오늘만 남은 사람처럼… 가끔은 오늘 이 한 날이 마지막인 것처럼 견디고 또는 바라는 날도 있다. 어디가 아플 때, 여기까지만 하자. 무엇으로 마음이 어려울 때, 이것까지만 하자. 하는 심정으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이제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니 오전 늦게 혹은 점심께나 나올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새벽을 사랑한다. 집에서 할까, 늦게 나와서 할까, 아니면 저녁에나 할까… 여러 마음이 쥐고 흔들 때 나는 하나만 생각한다. 오늘까지만! 어쩌면 이러고 싶어도 못할 날이 올 텐데, 할 수 있는 때까지는! 하는 심정으로, 나의 기름은 이러한 마음의 길을 따라 흐른다.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서너 명도 안 되는 누군가가 이 글을 같이 읽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잃게 하지 않고 싶어서… 그리하여 나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능력으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그렇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나는 받은 게 많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이로 인하여 오늘에 있고, 누구의 후원헌금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교회도 여전하다. 어제도 교단에 소속 정정 신고서 곧 주소 변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무서에서 그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다시 가야 한다. 그때 저이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여전히 그 정도 규모의 사람과 교회인가 하고 물었다. 저도 놀라운 일이겠으나 당사자인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주일 헌금으로는 주일 식사도 같이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는 어느덧 교단에서 오래된 교회(?)로 회비를 좀 더 올려야 할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게 아니었음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러니 능력주신 바 그 믿음의 분량대로, 한 달란트면 어땠을까? 그 정도여도 충분하다 하셨을 것을. 어느 훗날 주의 잔치에 들어갈 자와 버려둠을 받을 자가 분명한 것을 알게 한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 13).” 누가 알겠나? 교회가 무리하게 건축을 하고 그 빚이 늘어나서 교인들이 부담스러워하다 떠나가고… 그리 아니한 만 못한 상황에서 목사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성도들과 함께 이루지 않았으니 또한 오늘의 문제도 난감하게 되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21).” 다섯 달란트이든지 두 달란트이든지 혹여 한 달란트이든지… 어차피 성경의 계산법은 남음도 모자람도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한 달란트짜리 그리스도가 있고 다섯 달란트짜리 예수가 있다는 듯, 사람들은 안개처럼 쓸려 다니고, 교회는 이를 더욱 확장하여 조장한다. 그러나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우리가 받은 은혜란 이자처서 되갚아야 하는 채무가 아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 말씀의 이와 같은 계산법이 우리가 이 땅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계산법이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30).” 할 때에 저는 쫓겨나면서도 영문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하실 때도 고작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하며 그리 상급을 베푸시는 일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하시며 왼편에 있는 자들을 쫓아내실 때 저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는 저들의 항변에서 나름 한다고 한 것일 텐데(44).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럼 뭐하나? 주님은 모르신다는데? 교회를 건축 증축하여 세상에서의 가치는 한껏 성공한 듯 보여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 하실 때의 그 난감함은 돌이킬 수 없는 때이다. 아,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6).”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시 50:1).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 천지만물이 다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마치 뭐라도 해도 하나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줄 알고, 실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면서 그것이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오해로… 부디 나는 이 작은 일, 누구에게 차마 말로도 설명하기 부끄러운 형편이나 내게 두신 전부라 여겨 오늘 이 하루씩, 하루치의 은혜를 갈급해하며 살아가는 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그렇듯 하루씩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앉아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그리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