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전봉석 2023. 12. 1. 05:48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마 27:37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 52:9

 

 

새벽은 거룩한 시간이다. 다시 허락하신 하루의 시작으로 양심이 등불을 켜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때이다. 그런 시간에 누구는 악을 도모하려 모였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1).” 그러나 교회는 새벽 제단을 쌓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 119:148).

 

새벽은 은밀한 시간이다. 죄가 도모되기도 하고 자신에게 새로 주어진 하루를 말씀 앞에서 받기도 한다. 오늘 저들은 새벽에 모여 의논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욥 24:14).” 그렇게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미 2:1).”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해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1-2).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두고 여러 군상이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인류구원의 현장을 채우고 있다.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는 사람.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일.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신 후 입을 다무신 일. “빌라도가 …크게 놀라워하”고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며 간접적으로 두려워한 일. 결국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를 놓아주고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사람들. 이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던 것.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면서도 결국 군중들의 민란이 날까하여 저들 손에 맡기고 자신의 책무를 포기하는 빌라도와 로마법정.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는 사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며 조롱하는 사람들. 지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오르는 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는 사람들. 이때,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37).”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며 ‘알지 못함으로’ 그러하는 작태를 본다. 정녕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왔으면 구원은 이루어졌을까?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놀라운 사실로 우리의 죄는 사하심을 받았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그리하여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누구에겐 믿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떤 이에게는 더없는 은혜의 축복이다. 이를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고 뒤늦게 알기는 하나….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고,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장사지낸다. 이를 못미더워하여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문득 나는 저 많은 군상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예수님은 앞서 알게 하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예수는 죽으셨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라면 저는 정신 나간 젊은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실패하였고 끝내 죽음으로 그 끝은 초라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이야기를 안다. 이를 믿음으로 저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음을 안다. 이를 위해 오셨고 이내 다 이루셨음도 안다.

 

유다의 후회는 스스로 목을 달아 죽게 했다. 아담 이후의 죄는 우리에게 필연적이다. 다윗도 죄악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후회와 회개가 다른 것은 같은 새벽이라도 악을 도모할 수 있고, 거룩한 시간으로 주의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다. 어제 다윗은 회개하며 시를 지어 찬송으로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1-3).

 

이는 사람의 후예로 첫 사람 가인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에도 있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살인에 앞서 이와 같은 말씀이 있었음에도 저는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다. 오늘도 여전하여 우리의 죄과는 끝이 없다. 이때 우린 근심한다. 나의 나 됨을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우리의 근심은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교회를 이전하고 혼자 있으며 주가 어찌 행하실까, 기다린다. 기다림은 잔인할 정도로 무료하고 때로는 주체할 수 없어 비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자리, 그 시간을 이탈하지 않는 일. 그러는 동안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수정하고, 누구와 통화하며 저의 사연을 듣고, 다시 또 가만히 기다리는 일. 나는 이와 같은 기다림을 즐거워할 줄 안다. 낚시를 가면 찌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수면 위로 신호를 보내는 찌끝을 응시한다. 주로 혼자 가거나 누가 같이 있어도 대화는 간소하고 기다림은 끝이 없다.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하였다. 지금은 허리도 아프고 어깨에 문제도 있어 더는 못 간다지만… 나는 가끔 나 혼자 교회에 있는 시간을 그와 같이 즐긴다.

 

가만히 응시하다 어느 순간 모든 긴장과 열심이 집중돼야 할 시점이 이른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나는 다만 한 곳을 응시하는 사람으로 무덤 앞에 앉은 여인들처럼 혹은 지나가다 얼결에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가는 요셉과 같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신앙이란 더디고 느려 더는 가망이 없다 할 때까지 기다림이었으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렇게 누구와 대화하다 저의 사연 속에서 혹은 나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곳만 응시하듯 그리하여 혼자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이와 같이 말씀 묵상을 글로 쓰면서… 나는 새벽을 가르며 주의 전으로 나오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혼자 지루해하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겅중거리며 읽는 낮동안의 기다림을 사랑한다. 누구를, 왜 기다리고 있는지도 잊고 다만 여기에 있을 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는 휘장이 갈라졌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아무나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자리로 우리는 이제 자유롭다. 누구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아픈 아이’는 오지 않았고, 오후께 한 아이는 우울증이 심한 어머니를 두고 걱정을 토로하였다. 자신의 아내 역시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자신도 공황으로 힘에 겨워하면서도 내가 저에게 건네는 구원의 말씀에는 ‘나중에요.’ 하는 말로 그 영혼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기다림 속에서 누굴 생각하고, 어떤 이의 사연을 두고 주께 의논한다. 모든 게 다 때가 있을 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7-8).”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말씀 속의 여러 군상들로 서로가 노여운 까닭은 헛된 영광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그러므로 나는 기다리고, 전하여 알려줄 뿐 저의 마음을 가질 수도 붙들 수도 없다. 오히려 저들의 완고함에서 나의 그릇됨을 돌아본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하여,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52:1-2).

 

예나지금이나 여전하여서 우리가 주 앞에 서지 않을 때 누구라도 ‘악한 계획’으로 ‘날카로운 삭도 같이’ 자기 영혼을 벤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어찌됐든 나의 기다림은 길어졌다. 저녁 여덟 시까지는 혼자 있는 셈인데, 새벽에 나와 하루가 너무 길다. 나의 긴 하루는 하염없이 찌톱을 응시하며 기다리는 시간과 같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그만큼씩 주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6-7).

 

누구의 사연에서 이를 보면서,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8).

 

나의 의지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더욱 강해진다. 이는 앞으로의 일을 두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