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3-35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생각하는 것과 마음다짐을 한 것과 실제와의 간극은 멀다.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것을 또 하고 있고, 이를 늘 지켜야지 했던 것은 어느 순간에 시들하다.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주 앞에 엎드린다. 나의 약함이 주를 찾고 구하게 한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 나의 구속에서 십자가는 필연적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 오늘 주님은 그 일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모두는 이를 알지 못했다. 하물며 제자들도 다를 게 없다. 그 가운데 베드로의 장담하는 말이 우리로 부끄럽게 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33-35).”
나는 평소에 늘 그러하다. 말이 앞서고 생각은 부추기면서 실제 그 상황에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며 그 어떤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에 급급하다. 나의 나 됨을 인정한다. 그런 날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어쩌자고 하나님은 나를 그처럼 사랑하신 것일까?
이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나는 아무 공로 없다. 구원에 있어 나는 그야말로 한 게 없다. 그런 나를 위하여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4-15).”
나를 위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라….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7-18).” 나를 넘어뜨리는 것은 교만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그 허용의 한계에서 “악인은 자기의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삼가느니라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21:29-30).” 지혜는 우리로 알게 한다.
이를 알면서 한 여인이 모든 것을 팔아 향유를 샀다. 이를 예수께 부어서 저의 말씀에 따른 장례를 예비하였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7).” 이를 비난하며 분개하는 제자들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이다. 저들의 이유는 그럴듯하였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9).” 그저 도식적인 판단, 실은 그 속에 아까운 마음이 먼저이고, 그것은 주께 드려지는 것보다 우선하는 자신들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
그렇게 자주 언급하시며 죽음을 알리셨는데도 저들은 정녕 그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일까?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그저 죽음이란 통상적으로 모든 사람이 거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 너머의 영생을 알 수 없다. 영생을 알지 못함으로 천국을 사모하지도 예비할 수도 없다. 그저 헛된 영광을 구할 뿐이어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왠지 여인의 행위가 월권인 것 같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내가 선을 구가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었다. 언제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죄가 무서운 것은 은연중에 나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더욱 그 범위를 확장한다. 두 마음을 품고 산다는 일은 이쪽도 저쪽도 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이 나로 성결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실제적이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내가 구하는 것은 선할 수 없다. 그것을 주 앞에 내어놓을 때 선을 이루신다.
가령 어제는 딸애의 생일이었다. 축하 말에도 썼지만 나는 한 게 없고 주가 이루신 게 전부이다. 일찍이 신앙과 믿음으로 양육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모범이 되지 못했고 가장 추하고 부끄러운 시절을 함부로 살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를 돌보시고 주 안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마침 오전에 누구와 통화를 하는데 저는 아이의 교육(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을 위해 홈스쿨링을 결심하였다. 자신이 아이에게 너무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리 결정한 것이 나는 의아했다. 나의 짧은 정신과적 소견으로는 저 둘 사이는 분리과정이 필요하지 밀착관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가끔 에둘러 말하지만 아이보다 그 부모의 생활태도가 더 큰 문제다.
그리 이르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할 소린 아니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딸애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로 시인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니…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부모의 안달과 간섭이 억압이 되기 십상이다. 주께 맡김으로 자기 영혼을 돌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이 여자가 행한 일’이 오늘에도 복음이 전파될 때면 온 천하에 전파된다. 이는 영광이다. 유일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옥합을 열었던 여인. 나는 종종 아무렇지 않게 저 아이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그보다 심각하고 낙후된 교육현장에서 나의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세상 속으로 들여보냈다. 물론 나는 놀림과 따돌림과 온갖 괴롭힘을 겪으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나의 부모를 원망하며 자라기도 하였으나… 나의 어머니는 날 위해 늘 제단을 지켰다. 밤마다 성전에 나아가 눈물로 날 위해 기도하였을 어머니의 기도로 오늘의 나는 있다.
요즘 엄마들, 글방으로 만나든지 교회에서 만나든지 모두는 자식 문제로 너무 애착관계를 유지한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그 주변을 맴돈다. 오늘에 이르러 나의 딸과 아들을 두고 볼 때도 나는 한 게 없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주가 이루신다. 저도 주의 자녀로, 나의 어머니는 그 배짱 하나로 주께 맡기셨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가 쓰실 거면 살게 하실 것이고 주께서 쓰실 일 없으면 언제든 거둬 가시라고 했다니! 어머니는 가끔 그런 얘기를 하면서 당당하다. 내 자식이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러나 그 속은 오죽하셨을까? 사지가 멀쩡한 것도 아닌데, 다들 지진아라 하여 거절하고 마다하는 것을 어찌 모르셨을까? 그럼에도 주께 부어드린 향유와 같이 어머니는 주만 바랐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12-14).
혼자 들어앉아 말씀을 쓴다. 심심하고 외로워서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내 곁에 두시는 아픈 아이는 ‘클로자판’의 부작용으로 두 시쯤 깨서 성경을 쓰고 다시 선잠을 잔다. 그 시간에 나는 교회로 나오다가 아이가 올리는 글의 알람을 듣는다. 우리의 절박함 그에 따른 어려움으로 우린 주 앞에 간절하여진다. 내 곁에 두시는 ‘상한 영혼’의 누구를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오죽하니 홈스쿨링을 해서라도 아이를 돌보려할까? 하는 마음으로 저를 불쌍히 여기며 주께 아뢴다. 오늘 말씀으로 나는 나의 속성을 인정한다.
예수를 판 유다를 생각하며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5).” 하실 때 저의 심정은 어땠을까? 왜 돌이킬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나는 두렵다. 그런 와중에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26-27).” 하실 때 주님의 심정을 생각하다 눈물이 고인다. 이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1).” 아, 사람 예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 하니, 이거 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예수님의 심정이 가슴 아프다. 이를 알지 못하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35).” 이렇듯 나는 얼마나 무책임하게 나 자신을 믿곤 하는지……. 결국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75).” 우린 결국 지나고 난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
다윗이 어처구니없다. 우린 저마다 어처구니없다. 늦게서야 이를 안다. 번번이 같은 실수고 같은 죄로 같은 회개를 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2-3).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4-57).” 하나부터 열 가지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으로만 가능한 은혜이다. 나는 한 게 없고 할 게 없어서 행여 내가 하려 할 때 주가 멈추신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교회로 주소를 이전하려 교단에 정정신청을 하고 세무서에 이를 신고하기로 했다. 글방으로 교습소로 운영을 하며 돈벌이로든지 밥벌이로든지 뭔가 하려니까 마음이 어렵다. 나는 목사다. 예전의 나는 죽었다. 아이를 보내시든지 안 보내시든지, 어느 한 영혼을 곁에 두시든지 그리하지 않으시든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하면,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6).
다윗의 회개와 간구를 읊조리며, 내게도 두시는 이 마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0-11).
다른 무엇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내가 무엇을 도모하기에 앞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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