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전봉석 2023. 12. 21. 04:33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 3:6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의 결과는 있다. 눈길 위에 보기 좋게 자빠지고 돌아와 아픈 곳을 어르며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듯이 우리의 남다른 안목은 역설적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있고 그에 눌려 사는 것이 인생일 테지만 우리는 이처럼 보는 눈이 다르다. 곧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 있음을 놀라워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4).” 하실 때에 이는 곧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5-6).”

 

결국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어떤 이는 구경꾼으로서 또한 어떤 이는 그에 따른 당사자로서,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6).” 과연 우리는 어떠한지?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7).”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을까?

 

정욕이란 본능이 아니라 앞날을 분별하지 못하고 지금 원하는 것을 행하는 일이다. 결과는 어찌됐든 당장의 욕구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의 정욕으로,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이 사는 데 따른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르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곧 이와 같은 가난,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허기를 느끼면서 천국을 소망하는 일. 이 일은 실제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을 지나면서 절실하여진다.

 

평소에 조심한다고 하다 어제는 보기 좋게 미끄러져 가랑이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런 가운데 제일 먼저는 창피함과 수치심이 몰려들더니 그 자리를 피하고 고통이 가중되면서는 어디 부러진 데가 없다는 데서 안도하였다. 가끔은 나로 사는 일이 어렵다. 어려워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누웠다. 혹시 몰라서 노트북을 챙겨갔는데, 아침에는 또한 이처럼 적당하여서 그것으로 감사하며 교회로 나왔다. 나는 나로 사는 게 힘에 겨울 때 주를 바라고, 주를 바라면 주님은 나의 가난한 심령을 채우신다.

 

웃음으로 감사하게 하시는 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그래서도 있는 그대로 감사할 수 있는 일. 엉덩이로 주저앉아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으로도 감사하고, 그런 상황으로 새삼 나의 나 된 것으로 감사하게 하심도 감사해하는 일. 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나는 이와 같은 같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서도 감사하다.

 

어쩔 수 없는 일에서 주님만으로 신뢰하고 주께로만 의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어차피 우리의 마음은 채울 수 없는 구덩이 같아서 그리 죽어라 애쓸 것 없다. 우리 능력껏 이루어야 하는 게 구원이라면 모를까, 이미 주께서 완성해놓으신 구원을 사는 일이라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리하여 나의 약한 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신다는 사실. 하여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남들이 들으면 혀를 끌끌 차며 불쌍히 여길 일이겠지만, 그럴 거 없다. 아무래도 며칠 통증이 있어 아플 것 같다, 하고 염려하였는데 이처럼 또 적당하여서 그것으로 감사히 여기며 이 시간을 주 앞에 또 앉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바울의 고백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안다. 그럴 수 있고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말씀을 되뇐다.

 

어제만 해도 구슬프고 지겨워서 나로 사는 게 힘이 들더니, 이렇듯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올 수 있었음을 감사,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시는 데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란 게 늘 나의 생각보다 옳으심으로, 칭얼대듯 힘들어하다가도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감사한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9).”

 

세례요한의 직설적인 설교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무리가 묻자 실제적인 답을 한다(10).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고 실제의 삶으로 가져온다(11-14).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의미가 없다. 우린 어느 벽화를 감상하거나 신화를 듣는 게 아니다. 사는 일이다. 말씀은 사는 일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충만하다는 것, 그럴 수 없는 중에도 감사가 찾아지고 되뇌어 나오는 것.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나는 종종 빈 공간에 놓인 화분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서 숨을 쉬고 볕을 쬐고 바람을 맞는다. 아내는 종종 날 위해 기도할 때 ‘교회를 지키는 일’로 비유하곤 하는데 나는 늘 그 대목에서 마음이 숙연해지곤 한다. 교회를 지키는 사람,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란 맡기신 이에 대한 최소한의 충성이다. 더욱이 세상이 그러하지 못할 때,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렘 14:10-11).”

 

이는 되레 나를 돌아보게 하여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다소 의식적으로 나는 주를 찾는다. 짜증도 부리고 신경질도 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어깨에 매달려서 위로를 얻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추켜세우려 하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이 놀라운 낮아짐은 임으로 취할 수 없다. 주를 바로 알 때 가능하다. 저는 오셔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7).” 곧 때가 이르러 정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나는 어떤 이에게 제안하였던 바를 저는 어찌 궁리하고 있을지 궁금하였으나 먼저 묻지는 않는다. 또한 누구에 대해 그 일을 두고 마음을 졸이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군다. 서러움인지 노여움인지 내 안에서 눈물이 되어 흐를 때면 그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러므로 때론 뻔뻔하게 또는 염치도 없이 나는 또 아뢴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사랑하신다. 체면 차리고 염치 지키며 예를 갖추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이를 아는 고로 나는 투덜거리다 나는 감사한다. 그러니 별 수 없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틀린 건 틀린 거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거라는 둥 마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위하는 척 하지만 그 속을 자신은 안다.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며 세례부터 받으실 때,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나는 이 말씀에서 내 이야기로 듣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를 주께 바라고 구하며 그리 여기고 사는 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곧 예수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되어 충만하여진다.

 

어쩌면 사소하였던, 늘 그러하였던 일을 겪으면서 새삼 또 한 번 주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몸소 체험하는 일. 이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나? 그리스도인으로가 아니면 세상이 감당할 수도 없는 말, 감사에 대하여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대상 23:30).”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7:17, 26:7, 30:4).

 

도대체 감사할 수 없는데 감사할 수 있는 것,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6-38).”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다가도 우리는 이미 그리 자라가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오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구하며,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72:12-14).

 

이를 알면 알수록,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