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전봉석 2023. 12. 22. 05: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 4:43-44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날이 너무 추워서 며칠은 아침에 나오지 말아야지, 하고 저녁에 들어갈 때 노트북도 챙겨간다. 그런데 이제는 몸이 알아서 알람과 상관없이 깨우니 별 수가 없다. 또한 이 자리에 있을 때 말씀 앞에 정신이 바로 든다. 또는 설교원고를 다듬고 정리하는 일이 즐겁다? 이 또한 몸이 기억하는 것으로 눈은 보고 마음은 적절한 단어를 찾아서 생각하기를 이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였을 때 시험은 수시로 우릴 위협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길이 있을 때 경건은 소망을 이룬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시험이 어찌 즐거울까만 환난으로 인내를 몸에 익힌다. 인내는 거듭되어서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 마치 운동선수의 반사신경과 같이 저절로 그리 되는 일이 때론 유익하다. 아침에 몸을 이끌고 교회로 나와 말씀 앞에 앉히는 일. 더러는 무료함이 숨통을 조이는 듯 외로움으로 확장할 때도 몸을 이끌어 묵상글과 설교원고를 다듬고 정리하게 하는 일은 유익이다. 누구에게라도 나는 글쓰기를 권하는 것은 이를 지속적으로 다시 다듬고 정리하는 동안 묵상이 되기 때문이다.

 

손이 닿는 곳에 자주 쓰는 물건들이 놓이고, 생각이 먼저 가 닿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듯이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께서 광야로 가셨다. 공생애에 앞서 시험을 당하실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가끔은 주의 일에 앞서 혹독한 훈련이 따른다. 결국은 주의 강권하심에 이끌려 신대원을 해야 할 즈음에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고 명징한 시련을 겪은 것 같다. 6학기 가운데 반 이상을 울면서 다녔다는 것은 정말 힘들어서였다. 돈도 없었고, 몸은 아프고, 정신과적으로도 난생처럼 공황이니 범불안이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였으니까, 대체 하나님은 뭐하자는 것인가? 하는 억하심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성령에 이끌리어’ 그리 되는 일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휴학해야지,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해야지, 하는 마음이 늘 나의 발목을 붙들었고 ‘그래도 계속할래?’ 하고 묻는 것처럼 현실은 진펄 같이 모든 일상은 푹푹 빠져드는 것 같았다. 먼저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 다음은 목사만 되면 뭐라도 달라지겠거니… 하는 현실적인 기대는 오히려 사람을 실망시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 만나게 하시는 동료나 가까이 하게 하시는 이들의 면모는 다양하여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에서 새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그때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12).” 하고 물리치시는 데서 어떤 원칙, 곧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하셨느니라.’ 하시는 것을 눈여겨보게 된다.

 

누구와 대화할 때 어떤 사연을 듣고 뭐라 말해야 할 때 나도 언제부턴가 성경의 말씀을 기점으로 그 근거를 삼아 권면하거나 위로하려 한다. 어쩌면 이 일은 모든 믿는 자로서 그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닐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는데, “말씀에 의지하여” 한다는 것(눅 5:5). 그러므로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4).” 예수께서 의로우신 것은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노아가 의인인 것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바로 이 은혜 곧 말씀에 따라,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시 17:4).

 

여기서 내 의지나 생각 따위로가 아니다. 믿음이 신념과 다른 것은 신념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믿음은 무모하게 들리겠으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결국은 말씀 때문이다! 노아의 무모한 방주 짓기도, 아브라함의 대책 없는 길 떠나기도, 모세의 말도 안 되는 출애굽도 모두가 다 말씀으로였다. 말씀이 ‘~하셨느니라.’ 하는 것을 붙들고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어떻게 우린 이런 황당한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리 말씀하셨으니 그리한다.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호소할 때도 말씀을 근거로 아뢴다. 말씀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로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13).” 결국 예수를 떠났다. 하여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신다(14).

 

이는 자랑이 아니라, 가끔은 이상해서 하는 말이다. 늦게 나오거나 나오지 말아야지, 하고 저녁에 누웠는데 이른 새벽이면 눈이 떠진다. 영혼이 몸을 깨우는지 몸이 영혼을 이끄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면 스스럼없이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운전을 하고 교회로 온다. 이른 새벽 빈 것 같은 건물에는 정적만이 가득한데 나는 늘 그러하듯 말씀을 읽고 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나의 한 날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강박인가? 싶을 정도로 의심이 들지만 몸에 밴 습관을 따라 다니엘도 예수님도 그 시간이면 하나님 앞에 몸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와 양해를 구하면, 나는 의미 없는 댓글은 지운다. 모두 숨기기로 해두고도 지우는 것은 이 글이 우선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고 쓰는 것이라… 나로서는 누구와 나누고 전하는 데 우선하여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서, 나는 수시로 다시 본다. 병원 대기실에서, 화장실에 앉아서도, 심심해서, 또는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도… 내가 글쓰기를 권하고 이와 같은 유익을 강조하는 것은 어차피 이제 우리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요즘은 지갑도 없이 핸드폰으로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다. 하여 나는 그것으로 나의 묵상글을 본다! 설교원고를 수시로 다듬기도하고, 비공개 방에는 누구누구에 대한 사연과 기도내용도 혹은 나의 구질구질한 넋두리도 모두 쓰여 있다. 이를 보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특혜요 특권이지 않나?

 

내가 하나님과 남다른 관계로 살기란 하나님이 그리 원하셨던 일 아닌가? 죽어라 하고 나는 하나님을 피해 니느웨로 가라 하실 때 다시스로 피하였던 요나처럼 도망쳤다가 붙잡힌 거 아닌가? 그럼 당연히 하나님은 나를 책임지셔야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셨으면 남다른 관계인 건 분명하지! 엊그제 자빠지고 너무 창피하고 며칠째 아파서 얼마나 하나님께 짜증을 부렸는지 모른다. 동생 일로도 그 상대를 두고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나 하나님에게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그런 걸 그냥 두시는가? 하고 화딱지가 났다. 수시로 나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고 요구한다. 뻔뻔할 정도로 염치도 없이…. 그래도 되는 사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8-19).” 오늘 본문은 예수님도 하나님과 그리 지내신다. 말씀하셨으니까! 말씀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다면 나의 충만함으로 나는 그래도 된다! 하나님 앞에 별의 별 소릴 다한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렵다가 그 하나님이 분명히 나를 먼저 사랑하신 것을 알고부터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 앞서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그 사랑은 특별하고 차별적이다.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24-27).” 나는 오늘 말씀에서 ‘그래서 나’를 ‘사랍다의 과부’나 ‘나아만’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 특별히 다가간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시나 그 가운데 나여서 하나님이 먼저 알아보신다. 그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을 것이고, 요셉은 그 억울한 상황에서도 군소리 없이 묵묵하였을 것이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사자굴이든지 풀무불이든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저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나도 안다.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너무 뻔뻔하며 염치도 없다. 그런데도 구한다. 마치 맡겨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주 앞에 아뢴다. 이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래도 되고, 그러라고 하셨으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교회를 지키며 이뤄가는 데 있어서도 내가 몸이 안 돼서 혹은 더 이상 능력이 안 돼서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어쩌겠나? 그래서 나의 똥배짱은 누구더러 오라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다고 안 올 이가 올 리도 없고 올 사람이면 싫다는데도 올 것이고… 이 교회로 주가 하실 일이 있으신 거지! 내가 어쩐다고 뭘 할 수 있겠나? 설령 그렇게 끌어 모아 유명해진들? 되레 부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다른 복음은 없다. 시시비비를 가릴 것도 아니다. 앞서 그 일로 평생을 싸운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6-7).” 하면 주가 하실 것이고, 나는 그 자리를 지킬 뿐이어서… 나의 마음이나 늘 깨어 바로 잡아야 한다. 아니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괜히 다른 데 기웃거리고 다른 이를 보다 걸음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4-11).

 

저들은 참 하나님 없이도 잘도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18-19).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가 알듯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아, 더는 돌이킬 수도 없는 곳에서의 저들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하여,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1-23).

 

그러므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4-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