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오늘 내용은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수록되었다. 그 차이는 있는데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홀로 갈릴리를 거니신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누가는 군중이 같이 따를 때였다. 또한 마태왜 마가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기 전에 저들을 부르신 것으로 나타나는데 누가는 고치신 후로 시점을 달리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안드레를 포함하여 넷을 부르신 것으로 기록하는데 누가는 안드레의 이름을 생략한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 고기 잡는 내용이 없는데 누가는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이는 저자의 시점과 기록의 의도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을 인상적으로 묘사하여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의 비중을 반영한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적인 신적 권능으로 부르신다. 네 제자를 부르시는 데 있어 저들은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거나 신분이 있지 않은데 주가 부르셨다. 곧 주의 눈으로 보실 때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은 무익하다. 예수님 스스로도 거리낌 없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 가르치셨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1-3).”
흔히 우리가 꾸미고 의미를 부여하여 인위적으로 거룩을 치장하려는 의도와는 다르다. 오늘도 다를 바 없지만 어부들의 삶은 고단하고 처절하다. 하루 잡아 하루 먹고 사는 형국이라 그 삶은 궁색하다. 이때 잡힌 무수한 물고기를 ‘베드로의 고기’라 하여 요즘 이름하는 ‘베쓰’라 부르기도 한다. 스스럼없이 모든 게 자연스럽고 형식적이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도 그 신분이니 지위와는 상관이 없으시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평소 가지는 선입견이나 형식적인 의미부여는 너무 과할 때가 있다. 성전을 꾸미거나 예배처소를 지나치게(?) 신성하게 하려는 의도자체가 불순할 수 있다. 의식에 따른 가운이나 예복도 권위적인 의미가 강하다.
오늘 베드로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4-5).” 저들은 고기잡이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밤새 고기가 없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렸다. 성경은 우리로 말씀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이를 주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하고 비유하셨다. 말씀은 따를 때 의미가 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로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보고, 듣고, 이에 행함으로 순종할 때에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곧 듣거나 보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나아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하는 단호함에 새삼 나를 돌아보게 된다.
말씀을 따를 때 후히 더하신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곧 우리가 순종할 때 풍성한 은혜도 따른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를 시인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 31:19-20).
이와 같은 삶의 체험이 성도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그러므로 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은 나뿐 아니라 내 곁의 사람에게도 큰 유익이 된다. 이를 오늘 본문 6, 7절로 보면,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 정도로 뜻하지 않은 풍성함이 서로에게 주어진다.
보면 어느 가정이나 교회든지 한두 사람의 헌신과 순종으로 다른 이들까지 은혜를 입는 것을 본다. 하만의 계략에서 에스더 한 사람의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신앙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확장한다. 예수님은 이를 한 알의 밀로 비유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가령 우리 부친 한 사람의 회심이 우리 일가의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쳤다. 두 동생들과 그 가정은 물론 우리 형제들과 그 자녀에 이르기까지, 나는 부친이 겪은 남다른 부르심에 일가의 영혼 구원이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강원도 평창 어느 산골 작은 예배당에서 부흥회가 있었고, 그때는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조부모의 모진 박해가 있었다. 찬 겨울에 발가벗겨져 쫓겨나기도 하고 뒷마당 찬 개물에 처박히기도 했다고 하니… 그런 가운데서도 복음에 붙들린 학창시절 나의 부친은 뒤늦게 부르심을 받고 목회를 할 때도 전투적으로 목숨 걸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한 사람으로 앞서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온갖 우상숭배와 샤머니즘적인 미신들을 끊어냈고, 안 믿던 전씨 일가에 복음의 씨앗이 된 것이다. 이렇듯,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덕분에 나는 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서 오늘도 홀로 안 믿는 가정에서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견지하는 성도를 존경한다. 같이 예배드리며 신앙을 지키는 우리 청년들에게 나는 실로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다. 일요일 오전, 안 믿는 가정의 모습은 눈에 선하다. 늦게들 일어나 한가로이 맞이하는 나른한 한 날에 홀로 믿음 안에서 주일을 지킨다는 일… 나는 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찌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은 불가항력적인 이끄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때에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그렇듯 나는 나의 부친을 부르실 때 이를 거역하지 못하였을 나의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다보면 아찔하다. 내 기억으로도 부친이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할 때에도 강원도 나의 조부 댁에는 곳곳에 귀신 밥이 있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뒷간 변소 안 재를 쌓아둔 자리에 하얀 메밥그릇과 그 위에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 온통 모든 게 다 미신적이어서 문지방을 밟았다고 혼나고, 조상들 위패가 모셔진 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혼쭐이 난 기억도 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족은 물론 그 일가가 이제는 대부분 하나님을 영접하고 산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이와 같은 고백도 복이라고, 나는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복음을 영접하고 신앙을 지켜가는 우리 교회 청년들을 사랑한다. 그 귀한 사명을 자주 일깨우는 것도 저들로 그 한 가정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일가친척들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어서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그래서 난 유난히 혼자 그 믿음을 지키며 안 믿는 가족들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는 믿음의 사람들을 존경한다. 곧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그러니까 나에게는 얼마나 이 일을 귀히 여기는가? 하는 의문을 의도적으로 갖고 간다.
공휴일이든지 어떤 날이든지 내가 이 시간을 지키는 데는 그 또한 혹시나 하여 나의 일관된 모습이 가족들에게 본이 될까 하여. 비록 보잘것없으나 필사적으로 새벽 일찍 주 앞에 나아와 말씀 앞에 나를 앉히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이젠 하나의 상징이고 표지이다. 억지로라도 그리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나만의 루틴으로 나의 하루는 이 시간을 시작으로 비롯된다. 이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누군가에게 나의 이 꾸준함이 도전이 되어 주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나의 이 보잘것없는 묵상 글쓰기가 누구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첫 발이 될 수 있기를. 이는 잘 쓰고 못 쓰고, 무엇이 어떻고 하는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나는 죽어져 한 날의 밀알과 같이 사라지고 우연처럼 따라했던 어떤 이의 묵상글에서 나는 매일 은혜를 받는다. 저의 일상적인, 지극히 사소하고 늘 똑같은 하루를 가지고도 말씀으로 씨름하며 주의 뜻을 찾고 구하며 의지하는 저의 글을 보면서 나는 종종 소름이 돋게 놀란다. 이렇게까지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모습에서… 나는 가끔 무너지고 자주 부끄러움도 느낀다.
모두가 사사로이 여기다 떠나기 일쑤인데,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6-69).” 그때나 지금이나 무던함이란 성령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때로 필사적으로 이 시간을 지키려 하는 것은 하루 중 나의 가장 귀한 시간으로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곧 말씀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엉터리 같고 하찮을 수도 있는 그 시간, 이와 같은 글쓰기는 그리하여 노아가 무던히 반복하여 나무를 다듬으며 구원의 방주를 지었을, 아브라함이 노구를 이끌고 그 모진 모래사막을 걸어갔을… 저들의 지루하고 또 한심하였을 반복적인 일상이 경이로운 이유다.
할 수만 있다면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18-19).” 그렇듯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것,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 이를 두고 누가 뭐라 그러든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예수님의 동문서답 같은 말씀 속에 길이 있다(23).
궁극적으로 우린 문제해결이나 병고침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26).” 나의 날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그리하여 나의 어쩔 수 없음이 나로 더욱 주만 바라고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감사가 되었다. 이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74:16-17).
나의 모든 게 주의 것이었음을 안도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2-23).
그리하여 나는 할 수 없으나 나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9: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0) | 2023.12.25 |
---|---|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0) | 2023.12.24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23.12.22 |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0) | 2023.12.21 |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0) | 2023.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