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눅 6:46-47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시 75:4-5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시고 부르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고 그러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다. 이에 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일은 저를 돌이켜 주의 자녀와 그 찬양과 경배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우린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곧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이 땅의 일시적인 것을 위한 게 아니다.
영생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안녕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그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있을 수 없다. 이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 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그러므로 주를 바란다는 일은 실제이면서 동시에 영의 일이다. 말씀의 본질은 묵상으로 닿을 수 있다. 이해와 상식의 언어로는 해결이 안 된다. 성경을 계시언어라 하는 이유도 주가 그리 열어 보이실 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자와 대화할 때 자주 부딪치게 되는 문제가 바로 저의 이해에 따른 함정 때문이다.
이것을 계시의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이나 고고학의 문제도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이에 따른 증거가 오늘 본문 서두에 나온다. 대제사장을 위시하여 저들은 자신들이 읽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운운하며 예수를 공격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그에 따른 예수님의 대답은 명징하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2, 5).”
곧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운운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이를 우린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하실 때 자신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은 없어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 22:16).” 하셨듯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3-15).”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일은 우리 의지나 우리의 어떤 판단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어제도 아내와 무슨 말을 하다 내가 새벽에 이처럼 기를 쓰고 교회로 나오는 데 따른 나의 확신을 말해주었다. 물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올 것을 안다. 더는 내 몸을 건사하지 못하게 될 때도 말이다. 그러나 오늘도 끙, 하고 일어나면서 걸을 수 있고 운전할 수 있어서 교회로 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길은 미끄러웠다.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면서 잠시 망설였으나 ‘어떤 강권하심’이 나를 붙들어주심을 느꼈다. 아내는 두어 명의 아이를 수업하기로 했다. 신기할 정도로 ‘그런 아이들’만 연락이 왔다. 한 아이는 중2가 되는데 초등학교 수준에서 멈추었고, 한 아이는 그 엄마가 어렵게 말을 꺼내며 일반 아이들과 달리 아이큐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였다. 기도해줘, 하며 아내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러하여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마음가짐을 다질 수 있었다.
고작 새벽에 나오는 일이나 어떤 아이를 가르치는 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일은 감당하기 어렵다. 또한 그것이 이 땅에서 밥벌이로 여겨져 더는 나을 게 없으면 신세 처량하다. 어쩜 신기하게도 두 아이 다 여느 학원이니 공부방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지금의 현상 그 이면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였다. 어쩌다 어제 오후, 한 아이엄마와 상담하는 내용을 방안에 듣고 있었는데, 나는 아내가 그처럼 말을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 상처 받았을 아이를 위로하고 아이엄마에게 소망을 더하는 말들은 주의 성령이 그 입에 부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담이 끝나고 아내가 물었다. 나 실수한 거 없어?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말’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주가 하신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물론 우리가 준비하고 구상하야 할 말을 미리 생각했다고 하지만 한 사람을 새로 만난다는 일은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일이다. 하여 우리는 기도할 때 돈벌이를 위해 학원을 운영하고 아이들을 받고 하는 사교육의 틀에 매이지 않기를. 아이 하나하나가 돈으로 보일 때 그 마음은 이미 병들어 성령이 더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룩을 도모하며 쌓는 게 아니다. 안식일을 운운하고 남들 보기에, 또는 해왔던 대로 틀에 박힌 사고로도 안 된다. 실제 아내와 나의 대화는 사사롭고 호기롭다. 퉁명스럽고 툴툴거리기도 한다. 우린 주 앞에서 자유하다. 그러다 어제와 같이 생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면, 물론 늘 그러했던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서 그런 말과 위로와 마음이 더해지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이엄마는 앞서 아이를 또 포기할까 하여 묻지 않은 상태(?)를 말하였고 아내는 마치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굳이 용기를 주려는 말도,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거 보면 우린 언제부턴가 그리 된 일을 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왜? 하고 묻지 않는다. 내가 넘어졌을 때도 다친 덴 없어? 하고 남 이야기하듯 듣고 만다. 그 속이야 어떨지 모르겠으나 각자가 하나님과 겨룰 일이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날이 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이 우리는 이 땅에서 까짓 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이번에도 교회를 주소이전을 하면서 교단에서는 교회회비를 조금씩 올려야한다더니 그냥 그대로 두었다. 우리 사정이 생각 이하였는지… 누가 종종 물을 때, 그렇게 해서 운영이 돼? 하고 염려하거나, 생활은 돼? 하고 놀란다. 그럼 나도 새삼 그런데도 운영에 어려움이 없고 생활도 되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새해부터는 목회자 사례비도 70으로 올렸다. 50에서 70으로 인상이면 어느 대기업 급여인상률보다 높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니 것도 늘 신기하다. 그렇게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실 이보다 더 든든한 보장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어서, 됐다 싶으면 거두실 것이고 그것이 교회든지 나의 생명이든지 모두가 주의 것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우리가 말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이게 진짜 된다! 나는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였고 이루고자 하는 꿈이 컸다. 억울해서라도 유명해지고 싶었고, 글을 쓰면 항상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소위 ‘등단 병’이라고 해서 연말만 되면 어디 신춘문예를 기웃거리거나 정식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려고 몸부림을 쳤었다.
그러는 동안 어쩌다 아이들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평생을 법벌이로 살 줄은 몰랐다.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하여 글을 썼는데, 돌아보면 나는 늘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것으로 항상 다른 보상을 받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리 되는 게 아니었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신 상황을 묵묵히 준행하는 일 뿐, 오늘 말씀은 이를 강조함이다. 곧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46-47).”
내가 그리 의도하여 성취한 게 아니라,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뿐 그 일을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여,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시 75:4-5).
이는 예전의 나와 오늘의 나의 다른 점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이를 알 때, 어떤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린다. 우리에게 맡기시는 한 영혼은 우리니까 감당할 수 있어서였다. 어제 나는 아내에게 오죽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아이들’을 보내시는 게 아닐까? 하고 되물었다.
주가 하신다. 다만 우린 그 자리에 있다. 어떤 아이, 이사를 하고도 그곳까지 오는 아이 한 명은 다른 데 갈 곳이 없어서이다. 사랑은 말씀의 완성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받은 사랑에 의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러할 때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결국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것. 내가 안도하는 것은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5).” 그러므로 우린 어쩌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나는 나의 지난날을 돌아볼 때 오늘의 은혜가 늘 감지덕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것. 교회도 가정도 우리에게 맡기신 이 모든 사역에서도….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75:1).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상황이 주를 가리킨다. 그러할 때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극한 상황에서 저들도 어떠하였을지 알 것 같다.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 맡김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하면,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2-3).
그러해도,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당연히 그러함으로 우린,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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