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7:23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우리는 인기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굳이…?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행동들을 한다. 남들 다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혼자 근신하고 조신하다. 모두가 흥겨워할 때 저는 조용하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누구는 그러하고 누구는 그런 자를 의아하게 본다. 그러나 이상하다, 싶은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스스로 세상과 구별되는 자이다. 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우리는 성탄절 예배를 어제 주일예배로 드렸다. 청교도들이 그러했듯이 조금은 자숙하고 경건하게 성탄절 당일을 보내시라 일렀다. 덩달아 흥에 겨워 좋아라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고 송구하다. 마치 내 아버지가 나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시며 나의 허물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 낮도 천한 자리에까지 오셨는데, 이를 기념한답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꼴 같다. 전능하신 창조주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나의 죄로 인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아기 예수로 오셨네, 천사들이 찬양하네 하며 마냥 즐거워할 일인지?
염치를 안다는 것, 오늘 본문의 두 사람을 보면서 새삼 그 의미가 깊다. 백부장은 예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장로들을 보내 자신의 종이 병들었음을 알리고 고쳐주시길, 그러다 벗들을 보내 감히 자기 집까지 오시는 것과 자신이 그의 앞에 나서는 일이 송구하여 말씀만 하셔도 될 것이라 아뢴다. 이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9).”
또 한 사람,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다. 모두가 저를 비난하고 저는 수치를 느끼던 모양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예수를 본다(37-38). 의당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일러 여자가 죄인인 줄을 예수께서는 아시는가? 하고 궁금해 한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말씀으로 빗대어 그 상황을 설명하신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바울의 표현대로 죄가 크면 은혜도 크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렇듯 죄 있는 여인의 송구하고 염치 없어하는 행동을 보며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은혜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 값싼 은혜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주의 사랑을 자신의 권리로 여겨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있지는 않는지…. 성탄절은 우리로 숙연하게 하는 날이다. 그런데 세상이 들떠 선물을 주고받고 화려한 조명과 요란한 캐럴을 불러대며 흥에 겨워하고 있으니 공연히 면구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굳이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가 싶기도 한데,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그런데 나는 종종 성탄절이 되면 하나의 기억이 흐릿하다 선명해진다. 어릴 적에 아무도 모르지만 도벽이 있었다. 나환자촌에 살았을 때 마을 중앙에 한 가게가 있었고, 당시는 그곳이 주민회관처럼 방송도 하고 전화도 돌려주던 곳이다. 친구 이모가 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친구와 같이 가면 스스럼없이 진열대에서 먹을 것을 집어다 내게 주었다. 어느 순간 나도 그렇듯 슬쩍슬쩍 계산도 하지 않고 물건을 가져오면서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교실에서 친구 물건에도 손을 대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슬쩍하는 손버릇이 생겼다. 한 번도 걸린 적이 없고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행동은 대범해졌고 뻔뻔해졌다.
샤프며 칼이며 심지어는 만년필까지 슬쩍하여 쓰다 가방 밑창에 따로 들고 다녔다. 어느 비 오던 날에 흠뻑 비에 젖은 가방을 빨겠다며 어머니가 가방 속에 있는 것을 꺼내다가 발각이 됐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아버지께 알리고, 아버지의 추궁에 결국 실토를 하였다. 당연히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러고 넘어갔으면 나의 도벽은 고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버지는 나의 등굣길에 같이 갔고, 문구점에서 내가 훔쳤던 물건들을 내어주며 대신 사과를 하고 그 값을 모두 변상하였다. 등굣길의 문구점은 항상 아이들로 가득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순간 정적이 흘렀고 주인여자는 민망해하면서도 뭐라 한 소리했다.
성탄절과 나의 이 기억은 자주 중첩되어 송구하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고개를 숙였고, 값을 지불했으며, 자신이 목사인 것을 밝히고 나를 대신해서 용서를 구했다. 나는 그때 창피하면서도 민망하고 나 때문에 아버지가 당한 수모 때문이었는지, 그 뒤로 도벽을 씻을 수 있었다. 모두가 흥에 겨워하는 성탄절에 나는 이와 같은 기억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감당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염치가 없다. 어쩌면 청교도들도 앞서 많은 이들이 흥에 겨워 크리스마스를 즐길 때 오히려 다른 날보다 숙연하고 엄숙하게 침묵하며 경건한 날로 보낸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늘 본문의 백부장과 죄 지은 여인의 믿음은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세례요한의 의문이 도드라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는 옥에 갇혀 있다. 이래저래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지 않았겠나? 그때에 사람을 보내어 예수께 여쭌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무래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는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다(20). 회의나 갈등이 의심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왜 저는 예수에 대해 그런 의문이 든 것일까? 이때 예수의 대답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알리게 하신다(22). 결국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를 보고 듣고도 의문이 든다면 더 뭐라 설명한들 믿겠나?
이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3).” 실제 우린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있어 많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 길이 맞나? 싶기도 하고, 왜 하나님은 몰라주시는 것이지? 하고 답답할 때도 있다.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다가온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28).”
다들 축하하고 축복하기에 충분한 성탄절 날 아침, 오히려 이 날을 경건하게 여기며 조금은 차분하게 또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주의 발 앞에 엎드려보는 것도….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죄 지은 여자와 같이 감히 조심스러워하며 주 앞에 설 때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하실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놀라운 은혜의 날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4-7).” 은혜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속물근성과 죄악 된 모습으로 감히 주 앞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그리하여 우리가 살면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곧 저들로 우리의 성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저들을 좇아 흥청망청 즐거워하며 산타클로스가 예수신가? 하는 객쩍은 농담이나 일삼는데서야. 성탄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이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날,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그러므로 우리 삶에 확신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하여 이 날은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더욱 주의 은혜 가운데 숙연한 마음으로,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50).”
하여,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시 76:7-9).
그리하여 더는 내 안에 어떤 트라우마 곧 원망도 절규도 없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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