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7 주일
전도서 8장
지혜자의 얼굴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8:1).”
들어가는 말
신정 통치 아래에서는 왕이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신다. 이를 아는 지혜자의 얼굴은 빛이 난다. 사물의 이치를 알고 깨달을수록 그의 얼굴빛은 평온하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고 만사를 자기 통제 아래 두려할 때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미간은 찌푸려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책임에서 그 무게를 내려놓게 된다. 이는 예수께서 일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 말씀으로도 증거가 된다. 곧 우리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뜻을 품고 대면하고 살면 우리의 얼굴은 하나님을 닮아간다.
①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덮어야 했을 정도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 34:35).” ② 순교를 앞두고 스데반은 그 얼굴이 오히려 천사의 얼굴 같았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③ 당연히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오늘 우리도 ‘지혜자의 얼굴’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하나님의 얼굴’이 비춰지는 일이다. ‘성도의 얼굴’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어쩐지… 하는, 어떤 남다른 모습이 있다. 다시 말해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아등바등 악착같이 사는 얼굴은 성도의 얼굴이 아니다. 더러는 바보 같고, 어이없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신체 가운데 자신만 볼 수 없는 부분이 얼굴이다. 얼굴은 반드시 거울을 통해서 본다. 혹은 누가 말해줘서 안다. 자신은 결코 자신의 얼굴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더러는 자신만 모르는 고약한 성미나, 신앙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성마른 고집을 부리는데 희한하게 자신만 모른다. 자식에 대해서도 그 부모가 제일 모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그와 같은 의미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얼굴 곧 ‘지혜자의 얼굴’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허무한 인생에서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1-8),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우리가 근신하며 사는 얼굴은 어떠해야 하는지(9-13),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세상을 어찌 바라보고 이해하는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14-9:1) 오늘 본문은 전개하고 있다.
1.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지혜자의 얼굴(1-8).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2).”
여기서 왕은 일차적으로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이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 23:5).” 비록 저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주범이라 해도 우리는 저들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그러므로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그 의미는 우리 자신들로 확대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를 토대로 오늘 말씀의 의미는 다시 1절에서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이는 우리 성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더 크고 선한 뜻을 간직하는 데 있어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이는 우리의 권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그러니 우리는 함부로 입을 들레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가리켜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 12:19).”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 그러므로 알 수 없는 미래를 살면서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4).”
※ 때와 판단을 분변하는 지혜
첫째, 말씀을 지키며 사는 지혜자는 분변한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5-6).”
둘째, 세상의 그 어떤 좋은 수도 결과적으로는 악하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7-8).”
2. 종말론적인 근신이 지혜자의 얼굴에 깃든다(9-13).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9).”
선과 악이 혼재된 세상이다. 우린 늘 갈림길에 서는 자들이다. 그 길 앞에서 우리가 주를 경외함으로 선택한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곧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결국은 헛되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10).” 저들은 왜 이처럼 대범하고 태평한가?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1).” 당장에 그 악의 결과가 드러나지 않음으로 괜찮다고 여긴다. 설마하고 뒤로 미룬다.
그러나 선악간의 심판은 예고된 것이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2-13).”
현실에 눈멀면 보일 리 없고 귀멀면 들릴 리 없는 게 심판에 대한 경고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시 37:1).” 우리가 저들로 인해 마음 상할 거 없다. 그럴 때일수록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저들은 우리가 상대할 가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3. 불가해한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아는 지혜자의 얼굴은 평온하다(14-17).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14).”
헛됨을 알면 최선의 삶도 안다. 우리의 최선은,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15).” 아무리 세상이 덧없고 부조리하다 해도 성도의 생활은 기쁘다. 지혜자의 얼굴은 평온하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오히려 우리는 알기 때문에 관용할 수 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관용하는 자의 얼굴은 조급하지 않다. 이를 위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다. 이를 순복한다. 때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에서도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16).” 잠 못 이루는 밤은 저마다의 수고와 애씀으로 못 견뎌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곤히 잤다. 예수님은 풍랑 중의 배에서도 깊이 잠드셨다. 잠은 사랑받는 자의 것이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이는 곧 ‘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여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17).” 우린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 그의 섭리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이에 우리가 확신하기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할 때에 주께 아뢰는 것,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25:7).”
나오는 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우리는 지혜자다. 여호와를 경외한다. 선악간의 일을 알고 분변한다. 이 땅의 끝을 분변함으로 우리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난다.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나서,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 같다. 곧 우리는 그와 같은 얼굴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러므로 우리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다.
곧 우리가 여유 있고 평온한 ‘지혜자의 얼굴’로 사는 것은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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