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4 주일
전도서 9장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전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전 9: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들어가는 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우리가 살아있음으로 상처도 입는다. 죽은 자는 상처를 입을 수 없다. 산 자는 살아서 ‘상처 입은 치유자’로 주 앞에 선다. 각자의 상처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이를 시인은 우리의 상처(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고 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곧 상처는 산 자들의 특정한 사역의 밑거름이 되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막 12:27). 저마다의 상처, 그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그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우리가 ‘한 영혼을 안고 씨름하기’는 온 천하를 얻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고 물으신다(마 16:26). 우리가 오늘의 삶을 귀히 여김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운다.
본문이해
살아있다는 것의 소중함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 구성은 모두 네 단락으로, 첫 단락(1-3)에서는 ‘인생이란 죽음 앞에 선 자들로 그 허무함을 인정할 때 유익하다고 밝힌다.’ 두 번째 단락(4-10)에서는 ‘해 아래 있는 동안 우리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세 번째 단락(11-12)에서는 ‘인생의 유한함을 일깨우고 우리가 내일의 소망 곧 죽음 너머의 소망을 이뤄가는 데 의미를 알게 한다. 끝으로 네 번째 단락(13-18)에서는 인생은 우매함으로 참 지혜를 누릴 수 없다고 한다.
1. 인생의 허무를 인정하는 유익(1-3)
왜 사는가?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일이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1). 인생의 결국은 같다.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다. 이는 “선인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인 것과 같다(2). 즉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3).
2. 해 아래서 생명의 가치(4-10)
1)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의 가치(4-6)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4). 곧 죽어서 유명하고 업적이 남다르다한들,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될 것이고,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질 뿐이다. 곧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더 이상 없다(5-6).
2) 해 아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분복(7-9)
그러니 인생에서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니,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7).” 이에,
첫째, 의복을 항상 희게 한다.
둘째,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한다.
‘의복을 희게 하는 것’은 그 행실이 올바른 것이고, 머리에 향 기름은 그 생각과 마음이 주의 향기로 가득함이다(8). 하여,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 이 향기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하고 바울은 증거하였다(고후 2:15-17).” 즉 믿는 자로 살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다(고후 3:3).” 그러므로 우리 삶은 다 읽힌다.
누군가의 상처에 치유자가 된다는 것은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우리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일이나,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으로 족한 것과 같다(전 9:9).
3) 해 아래서 최선의 삶(10)
고로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즉 죽고 난 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러므로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옳다하심을 얻는다(10). 이 모든 게 죽고 난 뒤에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3. 인생의 유한함을 알고 무한한 내일을 소망하는 지혜(11-12)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①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②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③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④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⑤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모두에게 임함이다(11-12). 곧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내일을 소망하는 게 지혜이다.
4. 인생의 우매함으로는 지혜를 누릴 수 없다(13-18)
결론적으로 인생은 죄와 함께 죄 된 세상에서 우매할 수밖에 없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서 하나님은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하신다.
이에 지혜자는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다고 하면서(13),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14-15).” 가령 거인 장수 골리앗을 이긴 것은 어린 소년 다윗이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인류를 홍수의 심판에서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게 한 것은 노아와 그 가족들 뿐이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 또한 ‘이스라엘’을 형성한 것은 야곱 한 사람이고, 그 후예들을 구한 것은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다. 요셉은 일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창 50:20-21b).”
그러므로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16).” 이것이 이 땅의 우매함 때문이고, 이를 인정하지 못할 때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17).” 하였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먹방’ 같은 콘텐츠가 팔리는 때에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허망할 뿐인 것이 사람들의 유행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하는 경고는 오늘의 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18). 다들 당장의 소득과 이목과 쾌락에 한탕주의처럼 만족하며 살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모두는 상처 받은 영혼을 안고 산다. 어느 순간 우리는 ‘따귀 맞은 영혼’을 맛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 이야기 속으로’ 파묻힌다. 이에 우리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오늘 우리가 겪는 ‘상처 입은 자’의 말에는 힘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이것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증인이 된다. 어떤 갈등과 오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친절한 타인’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나 편지가 되어 전달될 수는 없다. 문이 닫히면 벽과 다를 게 없어서, 단절된 사이로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통과할 수 없다.
우리가 주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상처 받은 영혼으로다. 이를 서로가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지체가 된다.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직고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눅 24:36),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사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하신 십자가의 멸시와 수치와 조롱과 부끄러움을 기꺼이 보이심으로, 그러한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뻐할 수 있었다. 이는 수치와 조롱이 기쁨이 되어서이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자의 말’에는 진실이 있다. 이를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하는 근심’을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소중함은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4).” 곧 우리의 소망은 영생을 누리려함이다. 곧 우리 산 자들의 소망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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