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전봉석 2024. 1. 14. 05:00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4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말씀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을 사모함은 나의 이해나 의지로 알 수 없는 이상의 것이다. 이에 간절함은 각처에 있다. 어제는 묵상글을 쓰고 이를 아침 여섯 시를 전후해서 몇 명에게 보내는데 깜빡했다.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디 아픈가? 하고 누가 물었고 그 이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내오던 묵상글이 오지 않아 궁금하였다고 했다. 새삼 서로의 간절함으로 주를 생각하였다.

 

말씀을 바란다는 것, 오늘은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 왔다. 아무래도 지위 때문이었을까? 남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왔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그리고 여쭌다.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저가 아는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선생’으로다(1-2).

 

우리의 어떤 사연으로 주 앞에 간다. 솔로몬의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를 인정할 때 주께 간절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듯 우리 인생의 어떤 간절함은 그 배후에 주를 바랄 수밖에 없는 동력이 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우리 인생의 밤, 어느 고단할 때에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잠 18:15).”

 

묵상글을 어찌 보내지 못했는가, 물었던 친구는 요즘 새벽예배를 나가고 새벽에 만나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너무 좋아 울먹였다. 그리고 출근을 하고 학교 교사 일을 해야 하는 하루가 고단할 텐데… 한 친구는 새로 시작한 제자반과 새벽예배로 말씀을 더 알기를 사모하고, 한 친구는 어떤 간절함으로 주를 바랄 수 있어서 감격스러워하고, 그러한 친구들의 사모함으로 나 또한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를 안다는 것, 알면 알수록 더욱 간절하게 사모함으로 주를 바란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우리의 거듭남, 예전의 나와 전혀 다른 나로 주께 서는 일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우린 이 마음이 어찌 그리 우리로 간절하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 형편과 사정은 더러 우릴 곤란하게 하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6-7).”

 

오늘 나는 나의 친구들의 거듭난 모습에서 놀라곤 한다. 저들이 어려서부터 같이 알고 함께 하던 이들이어서 더욱 든든하다. 구구절절 어떤 변명이 필요치 않다. 있는 그대로 어찌 그러한가, 알 수 있어서 복이다. 서로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일이었어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1).” 우린 더러 우리가 아는 것을 받지 않는 주변의 어떤 이를 이상히 여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

 

모세가 뱀을 든 일, 뱀에 물려 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뱀을 들어 보라 하려니 어떤 이는 오히려 강퍅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나는 누구보다 나의 친구인 저들이 새벽예배를 가고 말씀을 사모하면서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서 자신들의 남은 생을 다하려는 것에 감동한다. 서로를 잘 앎으로 주께 아뢰는 일도 울림이 크다. 곧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서로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음으로 같은 길을 간다는 게 나는 복되다. 문득문득 내가 새삼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저들이 어릴 적부터 친구여서 감사하다. 서로가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등지고 살았던 시절이 있어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저들 앞에 가리거나 더할 게 없어서도 좋다. 나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숨길 게 없다. 그런 가운데 다른 누구보다 저들이 새벽예배를 가고 그 가운데서 주의 은혜로 감격해 하는 것을 보면서 같이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희한하다. 곧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9-10).”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이와 같이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게 복이다. 서로가 거듭남을, 새로 지으심을 곁에서 증인이 되어 아직도 남은 길을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우리가 같이 신령한 일에 하나일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내가 저들에게 어떠한가는 모르겠으나 저들의 거듭남, 변화되는 모습은 나로 더욱 열심을 더하게 한다.

 

오늘 말씀으로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 곧 저들을 내 곁에 두심은 나의 연약함을 주가 다 아시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 서로가 감사하고 기쁜 일은 더는 정죄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곧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

 

우리가 주께 간절함은 각자가 얼마나 ‘자기 행위’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를 같이 어울려 도모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서로가 그때 일을 이야기하다 눈물지으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격하는 모습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일이었으니… 스스럼없이 우린 그 처지를 말한다. 어떤 어려움으로 질곡 가운데서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함으로 더욱 주를 바라게 된다. 나는 그러해서 서로가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사모한다. 이런저런 여건이나 상황이 어려워서 한 친구는 출근길에 또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전화로나마 말씀을 나누기로 하였고, 또 한 친구는 방학 중에도 빠듯한 일정에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하고 날짜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후 2:13).”

 

서로의 간절함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가?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데 있어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나는 저들이 그러하여서도 감사하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가 서로 그러할 수 있어서 또한 희한하다. 살며 사랑하며 함께 하였던 이들과 가야할 길을 가는 동안 주 안에서 문안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음이 복이었다. 오히려 신학을 같이 하였던 동기들과는 서로가 성경을, 하나님을 안다고 여겨서인가 소원한 일인데, 같이 죄 가운데서 젊을 때를 보내었던 친구들의 주를 사모함이 귀하다. 

 

아침에 묵상글을 쓰고 이를 직접 보내는 이가 열두 명이 있다. 물론 그 가운데 대부분은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누구더러 읽으라는 게 아니라, 서로는 이를 확인하면서 오늘도 묵묵히 이 길을 같이 간다. 같이 간다는 든든한 응원이 필요한 시절이다. 홀로 외로워한 적이 있는 영혼은 안다. 더러는 하나님과 독대하고 씨름하여 말할 수 없는 고독감으로 홀로 남겨진 것 같을 때, 묵묵히 이 길을 동행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은혜였다. 더욱이 내게 저들은 같이 주를 멀리하며 한때를 돌아오던 친구들이 아닌가?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38).”

 

서로가 하나 된다는 것,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그러므로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49-50).”

 

그래서 가끔은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일, 이 모습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와 같이, 언제든 돌아보면 그 지점을 알려주는 깃발이 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하는 게 없으나 그러므로 늘 이 자리에 있는 것, 이와 같이 주를 바람으로 더러는 사소하나 엄청난 사실이 되고 기점이 되어주는 일…. 실은 저들 친구에게 내가 한 게 무엇이겠나? 어떤 대단한 일이 없었어도 나의 묵묵함으로 부디 푯대가 되고 기점이 되어 좌표를 잃지 않도록, 어쩌면 나의 이 묵상글은 그런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누구에게는 아예 읽히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썼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는 길을 잃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요한은 이르기를,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7-28).” 나는 보잘것없으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나의 이와 같은 모습이 부디 저들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나에게 들리는 것이 너에게 보일 수 있고, 나에게 보이는 것이 너에게 들릴 수만 있다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33).”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이를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주는 신호가 되고 표상이 되어, 우리 가는 길에 그 남은 길을 같이 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기도를 부탁하고 그의 처한 상황을 허물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내가 복이 많다 하는 것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서로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 같으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여 서로의 문안은 성도의 교제다. 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일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므로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서로의 처지를 알고 그 사정을 감안하여 합심으로 주께 간구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8).

 

하여 일심(一心)으로,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96:2-3).

 

이를 살면서 사랑함으로,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6, 8)

 

하여,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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