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전봉석 2024. 1. 15. 05:51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요 4:37-38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1-12

 

 

사마리아 땅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저는 앞서 ‘니고데모’와 같은 신분이 아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나 모두는 의지할 이가 못 되었다. 날마다 구차하게 물을 길어야 사는 여인이다. 이 여인과 오늘 우리의 모습이 중첩되는 것은 무엇일까? 예배를 운운하며 참된 예배를 갈급해 하는 모습에서도 그러하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는 데 급급하여 참된 의지를 찾지 못하고 산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서로는 사마리아 여인이면서 동시에 예수이다. 고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우리는 갈급해 하나 그 영혼의 목마름은 여전하다. 이에 구원은 열려 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4).” 사실 사마리아는 유대인이 꺼려하는 곳으로 요단 동편 베레아로 우회하며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서 피하였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예루살렘을 대신하였던 배교의 땅이라 하겠다.

 

예수께서 이를 알면서도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심은 ‘잃어버린 자’ 곧 저들 또한 역사적으로는 주의 백성이었음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그런데 서로 반목하고 배척하며 오히려 타국만 못한 사이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터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를 우리의 지상 명령으로 더하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주의 인자하심을 우린 너무 멀리 알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고 배척하면서 선을 긋고 구획하여 나누려한다. 교단을 운운하고 자신들의 교리에 함몰되는 것을 모른다. 그럼에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나는 누가 ‘우리 교회’로 오길 바라는 게 아니다. 설령 다니다 물리적으로 멀어지거나 여의치 않으면 기꺼이 가까운 교회로 추천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중심이다. 저마다 좋은 대로 하는 것이겠으나 우리 인생에 예수가 중심인가? 하는 데 있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오직 예수, 오직 주만을 바라면서 살고 있는지….

 

오후께 누가 어느 교회로 갔네, 그곳의 외형이나 그 웅장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예수 앞에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오늘 본문은 던지는 것 같다. 먼저는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7).” 이는 저의 필요를 알게 하려 하심으로다. 할 때 저의 대답은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면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하는 부연설명이 따랐다(9). 어떤 적개심이나 경계를 두고 저마다 예수를 만나길 바라지만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한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왔고 각자의 요구나 필요를 구하였다. 그러나 저마다 자신의 필요를 바랄 뿐 정작은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알고자 하지 않았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저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데까지는 이르기가 쉽지 않다. 곧 이를 알게 하실 이는 하나님이심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오늘의 나로 주를 바라게 하심도, 내 곁의 아무하고도 주를 더욱 알고자할 때 그에 따른 마음을 더하시는 이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아니시면 어림없다. 어제 오후께 누구는 몇 주째 어느 교회로 나가고 여전히 등록은 하지 않으면서 이런저런 말을 보태는 데 있어 내가 뭐라 할 게 없었다. 나는 이제 확신하는 것이 임의로 누구를 돌이킬 수 없다. 구원은 내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알게 하는 일도 내가 나서서 될 게 아니었다. 한데 저의 수고가 저로 더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오늘 사마리아 여인은 그렇듯 경계하며 엉뚱하게도 말한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앞에 모시고 저는 역사를 들먹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곧 자신이 아는 것으로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셈이다.

 

곧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그러자 주님은 그녀의 목마름, 그것을 채우고자 얻어 사는 저의 의지하는 것들을 소환하신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이어지는 대화가 맥락이 없는 듯하나 실제 우리의 목마름은 다른 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예수는 알게 하신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여자가 대답하자,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하시며,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시며 그 허점을 짚으신다(17-18). 결국 물을 달라하심은 실제 저가 물을 길으러 왔음이고, 근본적으로 그 물로는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 앞에 나오나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갈증은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님에는 늘 목전의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지혜는 일러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 2:17).” 이를 알면서도 그렇다고 하면 저마다 아니라고 하니, 누가 홈스쿨링을 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누가 여기저기 큰 교회로 전전긍긍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는 누가 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여하는 일도 쩔쩔매는 것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늘의 내 아버지’가 아니시면 저들이나 나나 온전히 주를 바랄 수가 없다.

 

물론 어떤 어려움, 고통 가운데서 우린 주를 찾는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 사람으로 이 땅에 살면서 그와 같은 현상이야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좀 알 것 같을 때,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하고는 저가 들어 아는 예배를 운운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곧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여러 말을 뒷받침 삼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하시면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22).”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저마다의 지금, 이 시간이 예배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자신의 죄를 알고 그 형언할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면 알수록 우린 더욱 간절히 예배를 원한다. 곧 주를 찾는다. 외형적인 어느 교회나 자신이 어찌 감당하려 하는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그저 다만 나의 이 상한 심령으로 주를 간절히 바랄 뿐이어서 다른 나의 지식이나 주장은 사라지고,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16:16-17).

 

오늘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가 행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 할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 우리 주님은 언제부터였는지, 언제까지나 내 곁에 계시었다. 우리가 사는 이유,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나 문제의 원인도 모두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며 ‘예배가 되는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인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를 꺼려하는 것은 그들 중에 계신 예수는 보지 못하고 그들로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나도 알 것 같다. 이해한다. 나 같아도 같은 값이면 큰 교회를 선호하고 멀찍이서 관람하는 자로 혜택을 원한다. 다만 그럴 때 놓치고 있는 것은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 추수할 때가 이르리니, 나는 알곡이겠나? 쭉정이겠나? 우리가 맺을 열매는 무엇일까? 더러 나는 내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 하시면서 주가 나로 그 예배에 참여하게 하신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8).”

 

곧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나는 다만 이를 받아 감사함으로 먹을 뿐이고,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그저 나의 예배는 주가 더하시는 은혜 가운데 거함이었다. 내가 죽어라 하고 무얼 심고 싹을 틔워 열매를 맺어 추수하는 일이어야 할 줄 알았는데,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 34:14).”

 

정작 은혜를 구하면서 거저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꼴이었으니, 은혜의 예배란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었다. 곧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뭘 꼭 해야 한다는 강박도 실은 자신의 의지나 만족을 채우려는 것이었을 뿐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97:1).

 

그것으로 되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더는 필요한 게 없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 이 놀라운 평안의 예배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누리고 참여하는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이다. 그때에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