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전봉석 2024. 1. 16. 04:5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시 98:4

 

 

저마다 구구절절 사연이 많다. 이런저런 자기 생각으로 말씀을 쉬 받지 못한다. 스스로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배척한다. 실제 자신의 짧은 경험으로 속단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네!’ 하고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렵다.

 

여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6). 그런데 저는 구구절절 말이 많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사연이 긴 까닭은 변명을 늘어지면서 핵심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의 방어기제다. 거두절미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굳이 다른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우린 어쩌면 너무 많은 감정소비와 그에 따른 말의 소비를 하며 산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죄의 기제다. 생각이 많으면 말이 많고, 꿈이 많으면 허튼 생각이 많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 5:7).” 그런데 이 꿈의 실체가 실은 걱정에서라면,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3).” 결국 말이 많은 이유는 걱정 때문이고 걱정으로 인해 허튼 꿈을 꾼다.

 

왜 나는 굳이 죄인이라는 절실한 고백을 할 수 없을까? 출근길에 친구와의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저는 성경에 밑줄을 긋고 사진을 찍어서 질문의 근거를 들었다. 먼저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하는 내용으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하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물었다. 공관복음으로 마태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역을 구약의 실현으로 보았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나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하는 부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을 드러낸다. 이것이 어찌 그리 와 닿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상하고 꺼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쓸모없을 죄인 된 우리를 오늘 이렇게 주 앞에 세우시고 살리신 데 대한 어떤 감격이나 감사가 없는가하고 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며 저의 난간함을 고백하였다. 이 또한 주가 더하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라 억지로 주입하여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사연에 시달린다. 각자의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한다. 오늘 여기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뜬소문에라도 기대고 있다.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2-4).” 진짜 그러한지 어쩌다 그러한지 알 수는 없으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사는 사람들… 어쩌면 이는 오늘 우리의 실체가 아닐까?

 

다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교육에 기대를 걸고, 환경과 보건과 더욱 촘촘한 제도적 장치나 법제에 희망을 건다. 그러느라 촉법소년법이니 성소수자를 위한 인권을 운운하며 법령을 제정하기도 한다. 근현대사에 교육에 대한 환상은 타이타닉호란 상징적인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하다는 실체를 만들었고, 고작 빙산에 긁혀 두 동강이 나서 수많은 목숨을 잃는 경험을 했다. 오늘날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전쟁과 전쟁에는 저마다의 명분이 분명하다. 마치 우리는 신음하면서도 변명하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주저한다. 선뜻 다가서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에이, 설마! 하고 스스로 지고 이고 말만 길게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끄는 셈이다.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세월을 아끼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겠다. 주의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먼저 해볼 게 있고, 나중에 나이 마흔이나 쉰 살쯤 되어서 그래볼까? 한다는 소릴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일과 너희의 힘겨운 일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있으랴(신 1:12).” 이를 누구에게 향한 게 아닌 자신에게 돌려 묻는다 해도 합당하다.

 

때를 얻든지 못 얻는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이를 알면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달려나갔다(1). 이를 나의 아이와 우리 젊은 세대에게 강조하는 바, 나도 안다! 그 나이 땐 이런 말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 결국 갈 데까지는 가야 한다는 소린데.

 

결국 친구는 길을 찾고자 하여 더욱 알고자함인데도 그에 따른 자신의 이성과 몸에 밴 기질과 그 죄의 뿌리로 인하여 ‘자신의 납득’을 요구한다. 모세가 주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리하여 실랑이를 벌이며,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고 되물으며 사양한다(출 3:11). 분명 부르심은 같아도 보내심은 예외적이다. 그러나 부르심의 이유는 보내심을 전제로 한다. 하나 열에 아홉은 부르심으로 족하다고 여기면서 보내심은 한사코 외면하려 든다. 그러는 동안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 44:17).” 누군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말에는 다 나름의 우상이 깃든 까닭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18).” 이를 인정하기까지 그 자아가 너무도 완고하다. 은혜가 스며들 자리가 없다. ‘길가밭’과 같아서 말씀을 들어도 금세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와서 채간다. 그러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6-18).” 난감하다. 내 자신이 그러하였고, 그 이유가 자기 안의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었든지 또 다른 실질적인 사실을 바라면서였든지, 그리하여 사는 동안에 예수도 늦게 알아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 앞에서도 감격할 수 없는 영혼으로 황량할 따름이다. 여기 서른여덟 해 병자처럼 말이다.

 

저는 자신을 낫게 하신 이가 누군지도 몰랐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3).” 하여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14).” 이 말씀의 의미는 알아듣기나 했을까? 더러 핵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6).”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 안식일의 주인이 하신 일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하고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5).”

 

더욱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실 때,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7, 18).” 이 어처구니없고 답답한 상황에서 누가 뭐라 한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곧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19-20).”

 

오늘 우린 저마다의 삶을 산다. 먹고 사느라 전전긍긍하다 세월은 어느새 황혼에 이르러 그때 내가 주의 부르심에 응하고, 보내심을 합당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와 또 화가 나로 좌절하게 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를 살리셨다. 또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곁에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와 같이 주를 바란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터라, 그것이 되레 흠이 되고 벽이 될 것도 같은데… 하나님이 나로 감당하게 하시는 일이 참으로 기이하고 희한하다.

 

친구에게는 설명하면서 거침이 없다. 우리가 겁 없이 죄 가운데 있었던 때를 지적할 수도 있다. 더는 부끄러울 게 없으니 말을 돌릴 것도 없다.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가 너무 완고하였구나, 하는 것과 우리가 너무 먼 길을 도느라 몸에 밴 자기 생각 곧 우상을 참 많이도 이고 지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결국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하여,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

 

나는 그리 생각한다. 내가 어려서 그 마음에 담고 살았던 서러움과 노여움을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는데 그때 내 곁에 있던 나의 벗들을 내게는 증거로 세우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그러하심이었어! 나로 그리 또한 은총을 베푸시고 계시는 거였어! 하는 어떤 감사,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주의 은혜 앞에서 나는 자주 송구하고 감사하기만 하여 눈물이 난다. 같은 말씀, 같은 상황이라 해도 서로 다른 은혜였으나 결국은 하나여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우리로 이 한 곳에서 만나게 하셨다. 그렇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4-6).

 

주가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옮길 것이라는 게 아니라, 옮겼다! 그러므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우리가 죽었는데 살아왔다. 내가 결국 주의 부르심에 돌아설 때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것을 한심해하듯 현실도피를 운운하며 꺼려하던 친구가 따라서 오늘 이렇게 주 앞에 붙들렸다. 나는 내가 사랑하던 선생과 나의 철없던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나를 믿는 자로 아는 저들 앞에서 나는 저들보다 못한 죄 가운데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았었다. 나 때문에 교회는 안 다니겠다는 소리까지도 들었다.

 

그럼에도 주가 하시는 일이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 그리고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37-38).” 믿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하던 시절에도 주가 나와 함께 하셨다는 반증은 오늘을 맡기시려는 거였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 그리고 여전히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 그러한 내 곁의 주의 자녀들 앞에 세우시려고 오늘의 나로 말씀 앞에 두신다. 내게 이루신 말씀처럼 저 한 영혼까지도 주가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이를 인정하는 곳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3-14).”

 

내가 무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나 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기까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8:2, 4,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