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9:8
우리 의지로 주 앞에 나오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하시는 오늘 말씀은 의미가 크다. 믿음이 자의적이지 않고 신앙이 자기의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 예수님은 일깨우신다.
곧 오늘 내가 여기 주 앞에 있는 것, 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섬기는 일은 ‘오게 하여 주심으로, 그리하게 하신 이의 뜻’에 따른 것이다. 한데 우리의 가장 큰 오해이면서 그릇된 신앙은 표적을 구하고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하여 주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2절,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이는 사는 데 따른 절박한 것으로 연약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이에 주 앞에 왔다 주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도 있으나 더러는 그것으로만 시들하여서,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곧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바라고 주님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시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사람들이 떠나갔다.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와 같은 질의응답에서 우린 어떤 답을 드릴까? (67, 68).
예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그래서 주님은 가르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실 때 우리에게 현재 ‘좁은 문’은 어떤 것일까?
기도할 게 없어서 나는 끝나고 바로 나와! 하는 친구의 말에 놀랍고도 신기하였다. 그럼에도 무슨 마음으로 새벽예배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제자반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기도할 게 없다고 하였고, 나는 저에게 기도할 제목 다섯 가지를 적어주었다. 기도제목: 1) 나의 심령에도 성령을 부어주시길. 2) 돌이켜 나의 죄악을 주 앞에 회개할 수 있는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길. 3) 새벽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날마다 부여하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4)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분별하는 영을 더하시길. 5) 주의 부르심에 나의 남은 날 동안에 주가 맡기시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길.
나는 저의 순수하고 어린신앙이 귀하였다. 그리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요즘 나의 친구를 보면서 저의 경우가 우리의 보편적인 신앙의 수준이란 생각을 한다. 저는 가리지 않고 순수하고 우린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노련하게 자신도 속이는 것뿐이다. 실은 자신이 구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영생의 문제는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로 예수께 나온다. 심지어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 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 우리의 속셈은 너무 뻔하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오늘을 사는 데 따른 필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따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를 알면서도 함께 하심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즉 ‘내게 주는 자, 내게로 올 것’을 알고 참고 기다리시는 거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주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의 뜻을 이루려하심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 그 단 하나의 이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이 의미를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곧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곧 성경의 주제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영생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아니다. 여기서의 어떤 결과나 목표가 목적이 아닌데, 저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지나치게’ 이 땅에서의 삶에 뜻을 다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취향과 선택과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주를 따르고자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 산으로 가신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허기, 삶의 필요에 따른 요구를 아심으로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질의응답 형식으로 하는 친구와의 성경공부 통화가 내게도 유익이다. 어제는 저에게 네 개의 밭을 비유로 말씀하신 데 따른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음인데, 앞서 좋은 땅을 얻기란 무던히 개간하고 갈아엎어 땅 속의 돌들과 땅위의 가시떨기를 걷어내야 한다. 땅 속의 돌들은 우리 안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땅 위의 가시떨기는 온갖 상황과 여건과 환경에 짓눌려 그 신앙이 자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길가밭이다. 길가는 온갖 사람이 드나들고, 밟고 다녀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이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아스팔트를 깔고 대리석을 까는 꼴이라, 말씀의 씨앗이 심겨질 수 없고 은혜의 단비도 스며들지 못하고 오히려 얼룩져 볼썽사납다.
나는 저의 마음이 어떠한가 물었고, 주 앞에서 자신을 직고하며 대면하여 덮어두고 숨겨진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는 것들로 우리 영혼은 굳어졌고 막혀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 앞에 여전히 나올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어떠한 형태나 모양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지에 대하여는 주의 뜻이라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나의 오늘, 이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이 귀하였다.
나의 저의 안에 두시는 오늘의 열심과 그 마음의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에게 일상의 소소한 소원을 구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회개의 영이 저의 굳어진 마음 밭을 갈아엎으시기를 구하였다. 그럼에도 저의 오늘이 귀한 것은 신앙의 수준이나 정도를 운운함이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이 안타까운 상황은 앞서 다 아시는,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그리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곧 ‘처음 사랑’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저의 근황을 듣고 그 마음에 선교사로 평생을 주의 일에 헌신하다 귀국하여 오갈 데 없는 이에게 처소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귀히 보았다. 하나 주의 일에 있어 그 사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인 것을 알려주었다. 순수함으로 저의 안착을 돕는 일은 좋으나 그 이상의 책임을 가지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에 나는 놀라웠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곧 우리 안의 어떤 강박 같은 주의 일에 대한 부채감은 사탄이 더하는 마음이다. ‘광명의 천사’ 같이 그러한 마음과 일을 더하고 추진하게 하지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우린 의외로 신앙이 자랄 때 가라지도 같이 자라는데,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할 때이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순수하게는 자신들의 필요를 가지고 주 앞에 왔고 이를 높여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다. 스스로 어떤 순수함으로 그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주께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욕구가 인다. 사람의 이치와 도덕적인 가치로는 유익한 듯하나 그것이 아무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결국은 아니다.
오늘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시고(27),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다른 영혼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기까지 되갚아 헌신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그럼 그 ‘믿는 것’ 이는 더러 수동적이고 매우 소극적인 일 같이 보인다. ‘가라’ 하시는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고’, 또는 ‘지으라’ 하셨을 때 그게 언제까지인지 얼마나 소요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120년을 단조롭고 무료하게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과 같다.
그러느니 당장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주의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신앙은 의외로 단순하고 단조롭다. 주를 사랑함은 세상을 미워하는 일이고, 한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되묻는다(30). 그러면서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를 갈구하는 데 있어 주가 필요하다. 그러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하시는 엉뚱한 말씀(?)으로, 하나둘 떠나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
어떤 일, 무슨 위대한 주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를 먹는 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이것으로 우리는 영육간에 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이것이 오늘 우리의 꼬인 문제를 해결하고, 닥친 현실을 해소해줄 리 없다. 들고 나온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 하시는 말씀 앞에 누가 굴복할 수 있겠나? 내 안에 주의 영이 하지 않으시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오직 주의 관심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오늘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 생활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살림살이는 좀 폈는지 하는 따위로가 아니다. 결국 그런 가운데서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64).” 심지어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70-71).”
오늘 내 안의 ‘가룟인 유다’는 어떤 것인가?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1).” 결코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두렵다. 어떤 어려움이 혹은 육신의 질병으로 나는 언제든지 ‘유다’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드린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과연 내 안에 주의 뜻만이 온전한가? 되묻게 된다. 결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면,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3, 5).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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