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전봉석 2024. 1. 29. 05:04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요 18:18, 25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9-10

 

 

저마다 사정이 있다. 각자의 사정으로 생활반경은 한정된다. 스스로 옳다 여길 때도 사정에 따라 그 기준은 달라진다. 사랑할 땐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땐 죽기를 바란다. 살기를 바라다 죽기를 바라는 것이 미혹이다. 미혹 또한 자신의 사정으로 그때마다 다르다.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알지 못할 때 사람은 짐승에 가깝다. 실은 사람과 짐승이 하나여서 둘 다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흙의 속성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처지와 사정에 따라 사랑하다 미워한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실 때 비로소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창 1:2).

 

짐승과 다를 게 없는, 사정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사람이 생령일 때 짐승과 다르다. 짐승은 자기 사정과 여건에 따라 사랑하다 미워하고, 미워하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미혹은 사람을 홀려 그 정신을 갈팡질팡하게 한다. 흔히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던 사람이 그리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게 사람이어서….

 

오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자 멀찍이 서서 사람들 사이에서 곁불을 쬔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 우리말에 ‘선비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 했는데, 곁불은 ‘얻어 쬐는 불’로 ‘가까이 하여 덕’을 좀 볼까 하는 심사로 곁에 서는 곳이 그 자리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25).” 결국 이런 사달이 난다. 앞서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 그리할 정도로 혈기왕성하던 이가 조금 지나 저들 곁에 서서 곁불을 쬐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예수 앞에 나왔고, 예수를 따랐다. 그렇듯 사랑하던 이들이 지금은 미워한다. 저를 사랑하여 살기를 바랐던 자들이 이제는 미워하며 죽기를 바란다. 사정에 따른 존경과 사랑은 사정에 따라 금세 또 달라지기도 한다. 끝까지 사랑하기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허상이다. 이에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하는 이와 같은 신앙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실제 나는 일찍이 교회에서 자랐고 수많은 사람을 교회에서 겪었다. 모든 사회가 그러하겠으나 사람의 사랑은 좋을 때나 좋은 것이지 자기 사정에 따라 변한다. 내가 사람을 잘 믿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사랑하다 미워하고, 미워하다 사랑하는 것이 짐승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곧 우리는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바,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것은 곧 자신부터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와중에 저들 곁에서 곁불을 쬔다. 곁불을 쬐다 예수를 부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주의 사랑이 아니면 어렵고,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누구를 사랑함에 있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 하심에서 왜 그처럼 사랑이 어려운가를 알겠다. 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먼저 주를 사랑함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 그게 어려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수도 있다.

 

흔히 좋은 사이, 좋은 사람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 일인가 하면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 정도에서다. 즉 저마다 자기 사정이 우선이라,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데도 멀찍이서 따르다 사람들 사이에서 곁불을 쬔다. 이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거 보면 사는 게 참 구차스럽다. 저마다의 사정이란 게 참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주의 뜻을 따른다고 하니 우리의 죽을 각오란 게 얼마나 가벼운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그때마다 다르다. 교회를 이사하면서 아내는 모자란 돈을 카드서비스 받아 대체하였다. 나는 중간에서 말도 못하고 있다. 우선은 안 믿는 자에게 저의 사정을 이해하는 일인데 행여 교회나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을까 하여 아내를 진정시킨다.

 

그렇듯 누구는 자기 몸이 아픈 데도 누구의 사정을 돌아보고 저의 일을 어찌할까, 하고 주의 뜻을 바란다. 누구는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듯 자기 사정을 우선하는 것이고, 누구는 제 코가 석 자인데도 남의 사정을 돌아본다. 같이 믿는 자이면 사정을 말하겠으나 상대가 안 믿는 자일 때는 매우 조심하게 된다. 가령 건물 광고판에 글자를 새겨야 할 때 내가 우리 호실 자리를 쓰면 그 자리에 있던 곁에 사무실 것은 지워야 한다. 관리소에서는 왜 그런 걸 신경 쓰냐며 그냥 내 값만 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 그러자고 저의 상호를 지우고 그리할 수도 없고, 그럼 같이 바꿔야 하는데 저는 굳이 안 들어가도 될 돈이라 아까운지, 관리사무실에 묻고 내게 묻고 하며 짜증스러워했다. 결국 저의 것 반 값을 내가 더 물고 그리 좋게 해결하였다.

 

아내는 이런 것에서 나에게 뭐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곳이 교회이고, 서로 얼굴 붉힐 일보다 그리하는 낫다고, 앞서 보증금 일도 아내는 결국 현금서비스를 받아 우선 그리한 것을 두고 뭐라 한다. 나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기다리라고 달래지만,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더러 참 성가시고 한심한 일이기도 하다. 말로는 누구라도 죽을 각오도 하고, 천번만번 사랑한다고도 하는 법이나 것도 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그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곁불을 쬐고 있다. 우린 스스로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 서로의 기운 잣대는 자신들 사정이 늘 우선이라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다.

 

이런저런 일로 아내의 핀잔과 잔소리를 듣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때, 이런… 베드로가 곁불을 쬐며 예수를 부인하고 있다. 그렇듯 죽고 못 살 것 같던 집사나 권사나 장로가 하나둘 교회를 등지고 떠나갔다. 직분 맡은 자들이 그러한데 성도들이야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 흩어져서 졸지에 교회는 빚 위에 빚을 더해야 했다. 같이 뼈를 묻을 것 같던 사람들이 눈치껏 요령껏 떠나가고 결국 7, 8년을 간신히 버텨오다 교회 건물은 넘어갔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가 그래도 자기 살 궁리는 했을 거라 여기는데, 부친은 결국 500에 40짜리 월세로 나앉고, 어쩌다 같은 건물에 들어가 살던 우리는 당시 3500을 홀랑 잃고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그때 나는 극에 달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증오했다. 아버지의 일을 원망했다.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고 했고, 교회도 안 다닌다고 하던 때가 있었다….

 

종종 아내의 어떤 잔소리를 듣다가 나는 그때 일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셨는가를 자랑하듯 말한다. 어제 오후 아내는 이 달까지로 약속하지 않았냐며 닦달을 하는데 나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하긴 또 월말이라 카드결제일인 모양이다. 아내는 어쩔 수 없이 돈돈거리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자기 사정도 알아달라며 입을 빼물었다. 그러니 참 교회 일과 현실의 일 사이에서 주의 종이란 난처하다… 아, 그때 나의 부친도 그러해서 누구더러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리 당하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베드로가 저들 곁에서 곁불을 쬔다. 곁불을 쬐며 예수를 부인한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겠다.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 닭 우는 소리에 저도 나가 울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72).”

 

나는 항상 저마다의 사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다 미워하고, 살기를 바라다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미혹 앞에서 속수무책이란 생각을 한다. 혼자 속을 끓이며 주 앞에 아뢴다. 누구 일로 어떤 마음이 들 때면 굳이 내가 나서서 더는 어쩔 수 없다는 지점까지 난감하여 주를 본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어찌 되받아칠 수 있다. 원칙을 운운하며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있다. 같이 하게 된 옆 사무실 사람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표지 바꾸는 금액 6만원에서 3만원을 내가 더 낸다고 하니 마치 자신이 선심을 쓰듯 할 때, 그야말로 상대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로 아는 무염치 앞에서 나는 늘 의아하다. 이런 꼴이 싫어서 빚을 지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하는데, 오늘 주님은 그러는 나를 먼저 생각하신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산다는 일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 역시 언짢고, 마음 상하고, 화가 난다. 이런저런 사정이 나라고 왜 없을까? 그래서도 주 앞에 엎드린다. 내가 맞서 대대거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나서서 하면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 일일이 다 아뢰면 선을 이룬다. 사느라 다들 참 용 쓴다. 보면 늘 저마다 자기 사정으로 겉만 번드르르하니 사람으로 산다. 주 앞에 우리는 어찌 설까?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다음은 우리 몫이 아니다.

 

진리를 두고는 맞서야 하나 사는 데 따른 일에서는 주를 바라고 주가 행하심을 믿는 것이 우선 복이었다. 뭐라 하는 아내 앞에서 나의 이런저런 말은 궁색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더하시는 말씀은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곧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 하나님을 생각하여 참고 저를 이해하는 일, 이는 주가 날 위해 당하신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그리하여,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주가 갚아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9-10).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 하시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결국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 하였음에도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하는 저들을 볼 때면, 나는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짐승만도 못한 속성이 무섭다. 하여 우리는 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나는 할 수 없으나 주가 하게 하실 때,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잠 12:23).” 무던히 더욱 묵묵히 주만 바라고 이 길에 서기를. 누구를 대하는 일이나 어떤 일에 저마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서 부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이로써 알게 되는 진리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실제의 생활은 언제나 구차하고 때로는 비루하여 차마 주 앞에 외에 아뢸 곳이 없을 때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마음이 어렵고 몸은 고통스럽고 생활은 난처할 때에 주께 더욱 간절하게 되는 일이어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하여서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1:1).

 

어떤 어려움에서 주를 더욱 바라는 이들을 보면서, 비록 그 수가 한둘로 적을 뿐이라 해도 큰 힘을 얻는 것은, 저들 주 앞에 정직한 모임에서 주께 감사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누가 어떠하든지 나는 주를 바랄 뿐이니,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2-3).

 

이를 아는 사람은 더욱 주를 바라여서,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4-6).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