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전봉석 2024. 1. 31. 05:21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7-29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13:5-6

 

 

더러 그 의미보다 형식과 절차를 따지고는 한다. 말씀이 말씀하시는 데 집중하지 않고 문맥과 단어의 어원을 두고 씨름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의 심중을 헤아려 알려하기보다 관계와 예절에 주의하는 일도 있다. 소위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우린 엉뚱한 데서 씨름하기도 한다. 성경은 우리를 설득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말씀이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보이시고 말씀하시고 만져보게 하신다. 문득 드는 생각이 아이 때라도 엄마를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저가 무엇을 전공했고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엄마라는 사실을 앎으로 전폭적이다. 이는 불가항력적으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행 4:33).” 저들이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큰 권능’으로이고, 무리가 이 증거를 듣고 큰 은혜를 받는 것도 그 안에서다.

 

어찌 그러한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의미 하나하나를 따지고 대조하여 자신의 납득과 이해를 우선하려 할 때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특히 부활에 대하여는 어떤 식으로도 우린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리 여겨지고 보이고 믿어지는 게 큰 권능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부활의 목적은 분명하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어쩌면 우린 부활의 영광을 참여하기 위해 빈 무덤을 먼저 마주해야 한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더러 빈 무덤에서 맴돌 때가 있다. 어떤 문맥이나 표현에 대해 그것이 지칭하는 데서 헤매다보면 빈 무덤을 나오지 못하고 갇혀버리는 수가 있다. 더러는 성경은 운운하고 번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겉돌기도 한다. 정작 그 무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실은 어제도 그런 답답함을 느꼈다. 어느 대사에서처럼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데 어찌 홍시 맛이 나냐고 하면 무엇으로 이를 설명해야 할까? 말씀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보다 어떤 역사적 사실과 설명 가능한 것으로만 이해하려 할 때는 난감해진다. 정작 말씀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

 

우선은 헌신이다. 헌신은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 마리아는 일찍이 어둠을 뚫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1-2).” 예수가 다시 사신 것을 알지 못하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 빈 무덤을 알렸다. 비록 다 알지는 못하나 주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5-47).”

 

이를 두고 바울은 그 유명한 고백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나는 이를 붙들면서 내가 잘 하든 못 하든, 바로 알든지 모르든지 믿고 나아간다. 누구의 상한 심령을 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서 그것에 대한 대책이나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주먹구구식으로라도 나는 덤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주만 믿고 한다. 이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더러 이것이 해가 될지 득이 될지 모르나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 누구를 권하기도 하고 그의 일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러다 일을 그르쳐 망치기도 하는데 더는 그런 문제에서까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빈 무덤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어떤 대화를 하다보면 정작 핵심이 아닌 주변 이야기로 마음을 소진할 때가 있다. 그런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4-5).”

 

정작 필요한 것은 빈 무덤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일이다. 빈 무덤을 알리고 예수가 살아나심을 증거 하는 일이다. 이게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정작 우리는 하나님을 0.0001%도 다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성경을 다 안다 해도 하나님을 성경으로 제한할 수 없는 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그 이상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그냥 몰라도 된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육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한정되었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성경공부를 하다 나는 ‘어떤 막힘’을 느낄 때 이를 굳이 따져 물어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는 이를 성향이나 문과 이과로 나눠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정작 그 안의 교만과 아집이 완고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쑥 성경의 번역이나 문장의 오류를 운운할 때면 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영어에 능하고 헬라어와 아람어를 전공하고 히브리어로 유창하게 성경을 읽는다 한들? ‘아노라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되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럴 거면 혼자하든가 자신이 가르치지 왜 배운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상대가 있다. 우선은 말을 끝까지 듣질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내재된 염려나 근심은 의를 이루려할 때 더욱 생생하게 두려움을 부풀린다. 오늘 말씀에서도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4-5).” 아마도 저자 요한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데, 먼저 도착하고도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려움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필연적이고, 이는 더러 우울과 불안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반응이다.

 

모세가 죽고 뒤를 이어야 하는 여호수아로서는 당연히 두려움이 앞섰다. 이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하나님이 더하시는 용기가 없다면 나는 오늘을 어찌 살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곧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6-8).”

 

요즘은 같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누구의 일로 같이 대화하며 씨름할 때 나의 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이해를 구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더러는 말을 안 듣고 또는 했던 말을 또 해야 한대도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신다는 생각을 자꾸 한다. 그래서 비록 나는 어설프고 어눌해도 말씀으로 저에게 말한다. 이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내가 아니라 주가 하실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에 할 말을 입에 넣어주실 것을 믿는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6, 10).

 

나는 죄인이고 누구보다 못한 사람인 것을 인정할 때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데서 용기를 얻는다. 더는 죽어도 하지 않을, 할 수 없는 예전의 일들을 들어가며 우리가 얼마나 나아지고 달라졌는가를 어제는 강조하였다. 서로가 예전 같으면… 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일들에 대하여 이제는 감사뿐이다. 이를 알면서 더는 빈 무덤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우린 더러 너무 오랜 시간을 빈 무덤에서 허비한다.

 

또 하나는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복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19-20).” 저들은 그곳에 있었고, 함께 하였고, 함께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4).” 그러니 저로서는 답답하겠다. 모두가 그렇다 해도 저는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 정작 우린 늘 보고자하고 이해에 따라 호응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지식과 이해가 얼마나 누추한가?

 

그런데도 주의 긍휼하심은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저로 직접 만져보고 손을 대게 하신다. 그러자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 오늘 우리는 말씀으로도 충분하다. 여전히 보고자하고 어떤 표징을 원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살면서 이제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나의 완고한 교만으로 너무 오래도록 빈 무덤에 집착했던 것 같다. 할 수만 있으면 보다 일찍,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에 주를 찾고 갈급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고백이 일찍 더 내 것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113:1-2).

 

시편은 위로하듯 나의 마음을 다스린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144:3-4).

 

그런 내가 이제 안다. 그리고 시편을 따라 읊조리며 기도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113:5-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