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 19:4, 1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6-7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따를 때가 있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는 여러 핑계를 가진다. 스스로의 면죄부를 위해 남을 탓한다. 여기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으심을 알았다. 그럼에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다. 스스로를 위하고, 사람을 의식하는 데는 별 수 없다.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다. 상대의 어려움이나 그 처지를 헤아릴 능력이 없다. 이를 위해 편법에라도 의존한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4, 16).” 가령 사도들을 따르던 마술사 시몬이라 하던 자가 돈으로 성령을 사려 한 것과 같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모든 믿음으로는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사교적인 교회활동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를 우선시 하는 동안에는 그 믿음이란 허울뿐이다. 처음 아이와 그 가정에 대해 말할 때만 해도 남의 이야기 하듯 그렇대,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친구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그 상태와 그 가정의 형편을 자주 언급하며 자기 일처럼 염려한다. 이번에 우리 아이와 같이 기타를 가르치며 줌으로나마 그리 접촉하면 어떨까… 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네가 해!’ 하는 것이었다. 친구도 한때 기타를 쳤고 하모니카도 연주하였다. 자꾸 어디 누구 없나? 할 게 아니라, 네가 토요일마다 하면 되겠네! 하고 말을 꺼내자 친구는 주춤하면서도 결국은 그리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신앙으로 누구를 품을 때 누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하였다. 아이를 그 엄마와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저의 친가나 그 부친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고, 엄연히 가족들이 있으니 어디 시설에 보내기도 어려웠다. 문제는 점점 그 엄마처럼 되어 간다는 것인데, 항상 같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나이질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을 두고 입씨름을 하기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네가 하면 되겠네!’ 하는 말을 건네었고 친구는 결국 그럴까? 하고 생각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아이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하고, 엄마 외의 사람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돈으로나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성령의 역사를 바라고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저 교회를 다니는 게 친교나 사교모임의 일종이면 그것은 허사다. 마술사 시몬은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삼으려고 돈으로 그 권능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듯 ‘돈으로’ 어떤 행사를 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서로 좋게 하려는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없다.
여전히 우리 또한 예수를 모욕하듯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안 믿는 자는 안 믿으니까 그렇다 해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속이는 이와 같은 언사는 너무 흔하다. 가령 예수 곁에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그러했고 하나는 저러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눅 23:40-41).” 결국 우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2-43).”
아침 출근길의 통화와 점심시간을 이용한 성경공부는 친구에게도 그렇겠으나 내게도 유익하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이를 내 이야기로 이루어가는 일은 예수님도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과 같다.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함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이런 게 어디 억지로야 되겠나? 질의응답 방식으로 성경을 풀어 설명하다보니 나 역시 나의 이야기 안에 그와 같은 말씀을 찾아 적용하게 된다.
실제 친구가 그리하겠다고 할 때는 신기하였다. 그 고집에 끝까지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싶을 정도로 의아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해볼까? 하자 그 다음 대화는 어려울 게 없었다. 하나님이 어찌 역사하실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고, 우린 다만 그 주시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뿐이다. 모친이 조현인데 아이 또한 조현의 전조증세가 보이니 서로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의 아내는 그 모친을 건사하며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이를 주 앞에 내려놓고 감당할 수 있도록… 그러할 때 아이를 위해서도 좀 더 정신 차리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였다. 지금처럼 서로가 방치하며 의존하는 형태로는 도대체 답이 없다.
어쩌다 신학까지 하고 사역을 감당하던 이가 이혼을 하고 아이를 혼자 떠맡게 된 것인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울증과 함께 조현증이 한꺼번에 온 것인지. 아이 또한 그 사이에서 지능이 멈추고 깊은 우울에 빠져버린 것인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로 혀를 끌끌 찰 게 아니었다. 나는 보다 과감하게 저들 곁에 그 영혼을 두심은 주가 맡기심인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 마음이 가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면서 친구도 스스로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는 항상 두 마음이 있다. 그때마다 선택해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결국 남들이 어떠하든지 우린 우리의 길을 간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이를 다스리는 데는 이론이나 지식이 따로 필요한 게 아니었다.
주시는 마음에 따라 순종하든지 거역하든지.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이를 인정하기까지 더러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늘 회사 일 때문에 혹은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그가 제자반에 들어가고, 새벽예배를 참석하고, 틈날 때마다 성경을 묻고 더욱 알고자 하면서… 둘러보니 자신들 곁에 두신 상한 영혼의 주의 양이 있는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심을 저는 들었고 이제는 어떻게 할까?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맡기셨으면 그에 따른 능력도 주실 것을 말해주었다. 천하를 얻으려 온갖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사는 사회에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한다는 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맡기신 바 그 작은 일에 충성하는 거였다. 그리하여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내가 남보다 나은 게 있어서,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게 아니다. 하게 하시는 이의 능력을 믿음으로 행한다.
고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육신의 어떤 고통으로 힘들어하면서 친구는 달라졌다. 멀쩡하니 자기 좋을 때는 몰랐다. 그럴 때는 퇴근 후에 실내골프도 가고 주말에는 어떤 만남도 가져야 하는 줄 알았는데, 스스로 아파보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던가? 그러므로 우리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온다. 이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서로가 뒤바뀐 것처럼,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 오늘 본문의 이 기이한 현상은 안 믿는 로마인의 눈에도 이상했을 것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0-11).” 저가 주를 알고 믿었더라면 이와 같은 대화에서 하나님을 찾고 바라였을 텐데.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단 5:20-21).”
사느라 그저 사는 데 정신 팔려 살면 저는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잃는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구 일을 놓고, 또는 말씀을 같이 나누면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나는 새삼 주 안에서 하나 된다는 말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알아간다. 어떤 일을 두고 씨름하다 그 일에서 하나님이 우리로 원하시는 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게 되는 일이었으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8).” 비록 저가 겉으로 드러나게 하지는 못했어도 예수의 제자로 그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39-40).” 곧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놀라운 사실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하실 때에,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5-6).
그리 행함은 주를 사랑함으로,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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