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전봉석 2024. 2. 1. 05:0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저마다 그 속에 마음의 상처, 곧 트라우마가 있다. 이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그 충격으로 인해 다양하게 굳어져 성격이 되고 그의 행동반경은 제한되기도 한다. 일찍이 성경은 일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예수님은 부활 후 세 번째 베드로 앞에 나타나셨다. 오늘은 불을 피우시고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5).” 앞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도 저들은 모였다가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허탕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 그러한 저들을 불 곁으로 부르신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멀찍이 따르며 사람들 사이에 숨어 곁불을 쬈다. 무리 가운데서 저를 알아보고 ‘예수를 따르던 자’라 할 때면 ‘아니라’ 하고 세 번을 부인하며 피하였다. 예수님은 세 번째 나타나셔서, 불을 피워 저로 불을 쬐게 하시고, 세 번을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때마다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이르신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다시 물으시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다시 이르신다. “내 양을 치라.” 그렇게 세 번째 또 물으시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무너지듯 그 마음이 근심하며 대답한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신다(15-17).

 

우리의 안의 어떤 노여움, 그 마음의 상처는 맞닥뜨려야 한다. 마주하여 직면할 때 ‘근심’이 일어 마음이 더 어렵고 혼란스러우나 그리하여 답을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와 같은 심리상태를 아셨다. 저를 불 앞으로 부르셨다. 곁불을 쬐게 하시며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신다. 의도적으로 그리하심은 저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다는 자책과 죄의식을 마주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때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하다 근심하여, 비로소 곧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우리의 어려워하는 마음을 아신다. 누구라도 그 마음에 상처 하나쯤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어 완고한 사람이 되거나 안으로 숨어버려 자신감을 잃거나 한다. 그것이 뒤틀려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하기도 하고, 남에게 앙갚음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무의식이 고착되어 성격이 되거나 기질이 되어 평생을 쥐고 흔들며 자신을 조종하거나 남을 조종하려 하게 한다.

 

안으로 감기는 성향은 우울감에 젖어 살고 밖으로 삐져나간 경우는 조증으로 활달한 것 같으나 둘 다 그 속은 공허하다. 흔히 우린 성격 좋고 활달한 사람을 밝고 명랑하게 자랐다고 하는데 그 뒤 배면의 일을 알 수 없다. 저는 친절한 타인으로 모두와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으나 그 마음은 누구보다 냉정할 수 있다. 또한 안으로 숨어버린 사람은 소극적이고 늘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인 것 같으나 항상 남을 견제하고 신경 쓰느라 피곤하다.

 

오늘 주님은 부활 후 세 번째 저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럴 때마다 저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 그런 저들 앞에 불을 피우시고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3).”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에 앞서 저들로 믿음에 견고하여지기를 도우신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저마다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그런 저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하고 이르셨다.

 

어쩌다 넘어져 팔다리가 부러질 때도 있고, 감기 몸살에 걸려 몸이 아플 때도 있듯이 마음 또한 그리 상하여 낙심할 때가 있다. 그런데 몸이 아프거나 약할 때는 병원도 가고 약도 처방 받아 먹으면서 정작 마음이 아픈 것에 대해서는 기도를 강요하고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한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그러나? 열이 나고 온몸이 쑤시고 아플 때도 그러나? 기저질환인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을 때도 그러나? 그러면서 왜 마음이 부러지고 열이 나고 기저질환과 같이 고질적으로 아픈 것에 대해서는 기도로,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하는 것일까? 여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세 번째 다시 찾아와 불을 피우고 세 번씩이나 똑같이 물으시며, 저의 상처를 어르셨다.

 

주님은 서로 같이 하게 하시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이를 또한 서로에게 나누며 전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우리가 신앙으로 믿음 안에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일상이다. 인생의 수고와 노력이 따른다. 그때에 예수 없는 신앙과 믿음은 헛되다.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도 세 번째 또 예수 없이 모였다. 그러더니 그저 옛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니 그 삶이 그 허탕이라.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교회도 다니고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성도의 교제도 하는데 정작 그 영혼은 허탕인 경우가 많다. 서로가 친절하나 타인이다. 절대 남이 힘들고 수고하는 것을 같이 지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분과 사정에 따라 남도 있을 뿐이고, 교회도 그렇듯 수평이동이 흔하다.

 

마치 쓰던 핸드폰을 바꾸듯 언제나 손에 들고 다니더니, 언제든 새 것으로 갈아치워도 무방하다. 요즘 교회란 그러해서 유행을 타고, 자기 성향에 맞아야 한다. 누가 조금 싫은 소리만 해도, 혹은 자신이 별로인 것 같을 때면 언제든지 다른 교회로 옮기면 그만이다. 어쩌다 교회가 또는 성도의 교제가 핸드폰 바꾸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은 게 되었다. 그저 그만큼의 값을 더 물면 된다. 신앙의 소비를 꺼릴 게 없다. 영혼의 탈피가 거듭될수록 세상을 향한 몸집은 커지고, 말씀과 기도에는 능숙해진다.

 

누가 새로 교회를 옮기고는 새신자 성경공부를 권하자 불쾌감을 드러냈다. 성경에 대해 자신은 이제 어지간한 목사보다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처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초적인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등록도 안 하고 다소 ‘감성적인 목사의 설교’를 참고 들어준다.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서 하품이 날 지경이다.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데 나는 저에게 뭐라 권할 말이 없었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는 그의 영혼은 상한 심령이다. 이를 말하면 펄쩍 뛰고 화를 낼 게 뻔하다. 심지어 누구는 자신도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나름 안다면 알고, 한다면 다 해본 사람인데 누가 누구에게 훈계하는가? 하고 마음이 먼저 불편하다. 아픈 영혼이다. 예수 없는 신앙과 믿음이 늘고 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6-7).

 

남 얘기하듯 하나 행여 내가 그러지 않나 싶다. 그런 내게 주님은 일부러 그러시는 듯 아픈 영혼의 사람들을 붙이신다. 실제 누구는 그 마음의 병으로 고통당하면서도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내가 죽겠다. 오죽하면 나는 저에게 그 자신이 먼저 우울증 약을 먹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여 주 앞에 나아가기를 권한다. 같이 하자고 해도 마다하는 저에게 하나마나 한 소리인 줄 알지만 저 때문에 나는 오히려 내가 죽겠어서 주 앞에 엎드린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로 시작하는 친구 덕분에 나는 요즘 덩달아 성경공부를 한다. 나는 그에게 그의 곁에 있는 ‘아픈 아이와 그 엄마’가 네 영혼의 질풍이 되어 너를 성장시키고, 네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 우리 교회가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교인 수와 제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법한데 오늘까지도 건재한 것은 ‘한 영혼’ 주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더 한 영혼 때문에 보존되고 있음을, 나는 그리 설명하였다. 와 닿지도 않는 ‘온 천하를 얻는 일’을 날마다 이처럼 감당하고 있다.

 

저마다 나름은 했다고 할 때,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또는 저마다 자신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운운할 때,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나는 묵묵히… 고작 이 한 영혼을 위해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이 한 친구를 위해 점심 시간 또는 출근 시간에 나눌 성경공부를 준비한다.

 

때로는 내가 지금 혼자 뭘 하고 있나? 하는 슬픔이 혹은 외로움이 엄습할 때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부끄러운 말일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지금 이 시간이 나의 하루 중에 가장 귀하다. 저녁에 아이들이 야식을 시켜 먹을 때, 혹은 축구경기를 시청한다고 호들갑을 떨 때도 나는 이 시간을 위해 아홉 시 전에 일찍 잔다. 이제 다들 그러려니 하는데, 사실 나도 할 게 없어서 설교원고를 다듬고 정리하느라 한 주간을 보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05).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때로는 그냥 한다. 아이가 오면 같이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의 이러한 일상이 목회인지, 목사로서의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주께서 필요하시고 그리 사용하시고자 오늘도 교회를 존속시키심을 안다. 내가 무얼 하려고 애쓰지 않고, 어찌 해보려 다른 수를 찾지 않는 것도… 내 안에 있을 법한 숱한 노여움, 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나는 이것으로 주 앞에 선다. 할 때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나는 언제라도 부끄러울 것 없이 내가 환자이고, 어떤 상처가 있었고, 그게 얼마나 지긋지긋한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할 수 있다. 숨기지 않고 과장하여 달리 포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주가 나를 사용하심을 안다. 누가 내게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하고, 실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족의 혹은 자신의 어떤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내가 의사여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못한 환자여서 그럴 수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목사 같지 않은 목사여도 좋고, 교회 같지 않은 교회여도 좋다. 내가 좋은 것은 예수가 같이 계실 때 나는 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성가시고 귀찮은 그 아이와 엄마가 네게 은혜이다, 하고 친구에게 말해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 일로 갈팡질팡하는 사모에게도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은혜란 우리로 예수 곁에 바짝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하시는 오늘 말씀 앞에서 나는 ‘원하지 아니하는’ 일에서 예수를 더 갈망하고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른다.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114: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