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행 1:2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누가가 글을 쓴다. 말씀의 성취로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 예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태동하였다. 초대교회가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령강림과 복음의 약속과 지상의 명령을 기록하였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는 바울의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진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일은 더러 안 해도 될 생각이나 마음씀으로 고달프기도 하다. 누구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그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맡기신 달란트를 감당하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실제 우리는 은연중에 주의 일에 동참한다. 예전의 자신과 다른 자신을 마주한다. 서로의 달라지는 모습에서 성화를 본다. 성령의 열매는 가상의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그 무엇도 우리로 이와 같은 열매를 맺는데 방해가 될 수 없다.
사랑은 그저 단순히 누구를 위하고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의 이상한 감정으로 저를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는 데까지’ 그 마음은 확장한다. 또한 희락은 이 땅의 즐거움이나 어떤 성취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즐거울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의 주신 은혜로 넘치는 즐거움이다. 화평은 서로 위하며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듯’ 하게 되어 더러는 저로 인하여 내 안의 어떤 갈망이 주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또한 오래 참음은 모든 열매의 기본으로 그 자체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숙련되는 마음이다. 돌아오는 게 없는데도 나아가는 마음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도 그러하겠다.
자비는 누구를 가엾게 여기는 데 있어 내 코가 석 자인데도 깊은 사랑이 이를 주체하지 못한다. 양선은 행동하는 것으로 ‘양선하다’로 설명되는데 어질고 착한 마음의 바탕을 이룬다. 충성은 맡은 자의 덕목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는 증거이다. 부르심을 받았다면 보내심을 받는 것도 당연하여서 ‘내가 뭐라고…’ 하는 자기 안의 주춤거림을 물리친다.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정인데 이는 특히 격동할 때에 오히려 차분해지고 주를 바라게 한다.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모두 아우르는데 있어 정도를 넘지 않도록 한다. 그에 따른 알맞은 조절이 없으면 사랑은 집착이 되고 희락은 쾌락주의로 흐르게 하고, 양선은 그 모양만 있어 착한 마음 뒤에 주저함과 원망이 스민다. 충성은 맹목적인 자기희생을 강요하고, 온유는 우유부단함을 이기지 못한다. 절제가 없으면 절제 또한 자기정죄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에 성령의 열매는 주의 사랑이 견인하고 말씀의 절제가 구동하여 뒤에서 민다.
매일 친구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가족과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새삼 이 대상들이 일반인을 상대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속속들이 그 됨됨이를 다 아는 마당에 저들 앞에서는 가식도 체면도 겉치레로는 어렵다. 남들 앞에서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서 이를 꾸미거나 슬쩍 거짓으로도 된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는 늘 지긋지긋하게 곁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로 이를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고 권면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같이 둘러 앉아 한 마음으로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게 은혜이고 성령의 역사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3-14).” 서로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쓴다.’ 서로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볼 꼴 못 볼 꼴 다 같이 보며 지냈고 잘 아는 터라, 이와 같이 마음을 같이 하는 데 있어 예수가 그 중심이 되어 말씀으로 하나 되지 않으면 어렵다. 서로를 보고 한 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주의 간구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같이 말씀을 나눌 때 이를 실상에서 설명하기란, 서로가 너무 잘 아는 사이라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매일 친구는 점심을 먹고 서둘러 전화를 한다. 30여분씩 전화통화로 성경공부를 하는데 실제적인 예가 본의 아니게 항상 서로의 일상에서다. 더러는 관념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쉬울 텐데, 그렇듯 숨을 수 있는 지형을 모두 거둬내고 지내온 터라 난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솔직하고 서로가 발가벗은 듯 까발리게 되고 그것으로 감정이 상하려면 상할 수도 있겠다. 가령 어제는 무슨 설명을 하다 ‘너는 완고하고 자기고집이 세잖아!’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게 되었다. 순간 남이었으면 마음 상할 수 있는 지적인데, 친구여서 그런 말도 가능하였고 그것에 대해 ‘그렇기는 하지!’ 하고 인정하게도 된다.
같은 마을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로 지지고 볶고 살던 사이에서 서로가 주님을 영접했다. 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쓴다. 초대교회의 힘은 서로가 잘 아는 사이다. 예수를 팔고 떠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뽑을 때도 서로가 그 선택을 주께 맡겼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22-23).” 이에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24-25).”
나는 친구에게 혹은 가족에게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어떤 부끄러움도 같이 가지고 전한다. 누구보다 내가 그와 같이 살지 못하는 사람인 것을 저들이 더 잘 알 텐데, 하는 어떤 부끄러움이나 쭈뼛거림에서 놓여나지 못하면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 한동안 내 안에서는 ‘너나 잘해!’ 하는 마음의 갈등이 먼저 들었다. 가족은 가족들이어서 그렇고 친구는 친구여서 더 그러했다. 그런데 전하다 보면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사이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느낀다. 흔히 바른 소릴 할 때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사람 앞에서 입바른 소리처럼 훈계하기는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니 더러는 마음이 앞서 주춤거리는데 그러해서 정직해지고 마음 편한 것도 있다.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사는 성도로서 그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비록 나는 그렇지 못한데 나의 그렇지 못함으로 숨길 수가 없는 나의 나 됨을 인정하게 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 될 때, 서로가 아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이는 주가 그 자리에 같이 모이셨기 때문이다! 오늘 3, 4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기서 ‘함께 모이사’ 하는 부분을 주목하게 된다.
즉 우리가 사적으로는 친구고 가족이라 서로 다 안다고 하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너와 나, 우리 사이에 주님도 함께 계시다. 그럴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난도 같이 한다. 당장 혈안이 되어 예수와 함께 했던 자들을 색출하느라 유대교나 로마가 극성인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시는 말씀에 저들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 로마 시내는 매일 밤 예수를 믿다 잡힌 자들을 불태워 거리가 대낮처럼 환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을 같이들 모여 기다린다.
친구와 누구 이야기를 같이 공유하고 어떤 일을 가지고 함께 기도할 때, ‘오직 큰 확신’이 들곤 하는데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단지 내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면 씨알도 안 먹힐 것이고, 그저 그렇다는 소리로 들리면 더는 들을 게 없을 것인데, 성경의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물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5-8).”
서로가 나누는 말씀으로 하나가 된다는 일, 이는 더러 희한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가끔 통화를 끊고 친구에게 전하였던 말씀이나 저가 듣고 묻던 내용을 두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에 대해 이처럼 마음을 쓰다니…’ 하면서 서로가 놀라워하는 일이다. 것도 희한했던 게 연말에 친구가 연차를 쓰고 와서 하루 종일 말씀을 나누고 대화를 할 때, 그날은 안 오기로 한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러니 그 친구 눈으로 보고 확신을 갖게 되는 증거였다. 하필 지금 그 친구 곁에 그와 같은 아이와 아이엄마가 있다. 그 일로 친구와 그의 처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전에 같으면 당연히 그저 그러려니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말 일인데, 더는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제는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주인의 내용으로 말씀을 나눌 때, 내가 몇 달란트를 맡았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우린 다만 ‘네!’ 할 뿐이다. 어찌될지 알 수 없으나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다만 주의 뜻을 따르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이를 설명하면서도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하고, 그 할 수 있는 것이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린 그게 다다. 그것으로 됐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고, 삶은 부대끼며 씨름하는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임이 성령의 일이다. 저는 자신도 성령을 바라나 성령은 이미 저와 내 안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우연 같이 모든 게 마침, 하필, 그리, 이루어진 것 같으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우리에겐 후회가 없다. 실패도 없다. 주가 다 이겨놓으신 싸움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여기에 같이 있다는 것으로 이미 승리한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나는 전하기를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로 너는 이번에 놀라운 경험을 하고 간증이 될 것이다, 하고 확신하였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방관자로 있을 때와 달리 그 일에 달겨 들어 먹잇감을 놓지 않는 사자처럼,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이것이 묵상이고 우리의 일상이다.
결국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복음을 사는 일이다. 복음을 사는 일은 전하여지는 일이고,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냄새가 나는 일이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그리 읽혀지는 일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러므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를 우리 삶에 드러내며 사는 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3).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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