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행 8:4-6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어떤 어려움은 늘 우리 곁을 배회한다. 환난이 왔을 때 저가 달려가는 곳이 저의 됨됨이다. 이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는데,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이를 풀어 설명하였다.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으로 각자의 몫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소망을 갖게 하신다. 다른 것으로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교회를 위해,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있어 이를 기꺼이 내가 지고 가는 것이 또한 십자가이다.
명절 휴가를 내서 오려고 했다가 요즘은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중이라, 고통을 호소하였다. 양쪽 고관절에 문제가 있고 허리와 목 디스크로 고생이다. 통화 저편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도 끙, 소리를 내며 신음을 한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로 주를 더욱 간절히 구하고 바람으로 또한 전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역설은 오늘 본문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마다에 더욱 심한 박해가 일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그러한 일로 우리는 운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눈물의 원인이 우리의 중심을 가늠하게 한다. 더욱이 믿는 자로 겪는 고난의 목적은 성장이다. 오히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 이것으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어찌 즐거워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의 자기 십자가는 팔자소관이 아니라 우리로 주 앞에 달려가게 하는 대항마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하고 말씀을 전하는 이이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이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곧 후에 이 일을 두고 저는 얼마나 절규하며 회개하는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차마 지난날이 죄스러워 주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이 은혜의 정도이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어서 오늘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 주고 사고 싶었던 그 마음을 이해한다. 언젠가 누가 내게 몸이 약하니 일반 목회는 어려울 터, 특별한 은사를 구하라고 일러준 말이 생각난다. 가끔은 그러한 역사를 꿈꾼다. 내게 어떤 신통력이 있어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 이목을 끌어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그러다 오늘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듯 무색함을 두고 주께 감사한다. 내가 아는 나로서 나는 주목 받는 생이면 얼마나 교만하고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졌을지 눈에 선하다. 우리로 화평케 하는 능력은 진리 안에 있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혼자 있을 때,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을 때 찾아오는 우울함에 대하여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새 힘을 얻어, 가령 이 이른 아침에 일찍 눈을 뜨고 교회로 나왔다. 설 연휴 시작이라 전날에 약속을 정해 누굴 만나거나 늦게까지 놀만도 한데, 나는 필사적으로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나를 둘러보고 내 곁의 이런저런 일을 두고 주께 아뢰는 일, 성령이 임하실 때 이는 역사를 보고 시몬 또한 이를 갈망하였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 8:18-19).”
물론 이와 같은 접근방식은 옳다할 수 없지만 그 안에 갈망은 이해가 간다. 가끔은 내 안의 어떤 갈망도 그와 같아서 그 의도가 불순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상한 심령 가운데 있는 누구를 돌이켜 세우고, 주를 바라는 데 있어 힘에 지쳐하는 이를 일으키고, 교회도 우뚝 세우고, 모두에게 주목 받는 생이고 싶은 욕구도 있다. 보란 듯 나의 목회(?)가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주목을 끌었으면 좋겠고, 그리하여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기도 하다. 혼자 생각하다 더러는 부질없음으로 혼자 웃기도 하는데,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를 위한 것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
가당치않은 생각으로 마음을 어지럽힐 때면 내게 맡기신 시간을 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을 설명하다 나는 알았다. 내가 그 누구보다 허영되고 자만한 사람인가를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친구는 문득, 자신이 이번에 두드러기가 난 것이 늘 명절 때마다 그간 못 만나던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진탕 놀고는 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를 막으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는 게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는 덧붙여 그동안 밀린 성경공부와 성경읽기를 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할 때는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요즘 나의 관심은 저와의 성경공부이다.
은혜는 차별이 없고 그 역사는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나는 이를 알고부터 혼자 이러고 있는 시간에 대하여 귀한 마음으로 받는다. 전에 같으면 조바심도 일고, 이 길이 맞나?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조급함으로 시달리기도 했는데, 전할 수 있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필요하다면 주가 하실 것이다. 내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붙이신다. 때론 하나 혹은 둘… 나는 여러 명의 여러 일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 다만 저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것, 누가 기도부탁을 하면 그 일을 두고 나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쓰이고 자꾸 또 생각나서 힘에겹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나는 친구에게 더는 멀리해도 될 친구들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하심이 복이라고 일러주었다. 보면 늘 기를 쓰고 서로 찾는다. 그래봐야 술자리에서 객쩍은 소릴 일삼다 엉뚱한 짓으로 죄를 범하는 것뿐일 텐데, 사회생활을 운운하며 여러 사람을 알고, 남다른 친분이 있고, 서로가 각별하다고 자랑하곤 하는 그것 때문에 주를 멀리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설마 저들 자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나누려고 그리 찾는 것은 아닐 터. 그러하다면 없는 이만 못한 것이라고 나는 자신하였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사이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멀리해야 하는 사이도 있다. 그 기준은 저로 인하여 내가 주를 가까이 할 수 있는지? 말씀을 나누고 주의 진리를 전하는 기쁨이 있는지?
저들과 가까이 지낼 때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저들과는 멀어지게 되는 사이면, 그렇듯 헛된 것이다. 듣다보면 다들 너무 쓸데없는 자리가 많다. 이 모임 저 모임 온갖 모임이 좋을 게 없다. 주를 멀리하게 하거나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자리이면, 무엇을 잃든지 영혼보다 귀할 게 없다. 학연, 지연, 무슨 동기, 어떤 관계… 그러면서 정작 저들과 만나 함께 주를 바랄 수나 있는지? 그런 자리는 늘 대수롭지 않게 하나님을 배제하고 말씀과 상관없이 서로의 친목을 다질 뿐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할 수만 있으면 모두가 목회자가 되길 권한다. 목회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사명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리이겠으나 어디에서 무슨 일로 누구를 만나든지, 성령에 이끌리어 서로가 말씀을 나누고 주를 찬송하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것이면 복되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어찌됐든 모두가 죽어라 하고 수고하고 애씀으로 한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주의 일에 쓰임 받는 생이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닐까? 나의 모친은 자주 말하길 본인은 다시 산다 해도 사모가 되어 주의 종을 보필하며, 교회에 헌신하고, 기도로 뒷배가 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복되었다고 한다. 내심 그 말의 의미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선택하여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겠으나 주가 사용하심에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생이 복이었다.
오늘 빌립은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행 8:26-28).” 비록 저는 이방인이라 하나 주의 말씀을 읽는 중이었고, 저에게 이를 풀어서 설명해주기를,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5-36).”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한 치 앞도 모르는 가운데 가장 유익하고 복된 시간과 일은 무엇이겠나?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주신 삶을 충실하게 살며 주를 찬송하는 게 또한 사명이겠으나… 나의 어머니의 표현대로 어차피 죽어라 하고 기를 쓰고 사는 세상에서 그렇다면 무엇을 하며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이겠나? 오죽하니 사울이었던 바울은,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6-9).”
앞서 내가 추구하며 살았던 모든 가치기준을 벗어버리고 이제 나는,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120:1-2).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내가 그리 수고하고 애쓰며 즐거워하기까지 하였던 것들을 벗어버리고,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3, 6).
그러한 삶은 결국 허망할 뿐이어서,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7).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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