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5-58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 119:147-148
사람마다 다르듯 믿는다고 하는 데도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예수 앞에 오는 자가 있고, 멀찍이서 구경하는 자도 있고, 어떤 계산으로 마술사 시몬처럼 돈을 주고 성령의 역사를 사려 하는 사람이 있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사람이 있다. 아예 무관심한 사람이 있고, 구경꾼이 있고, 교인이 있고, 성도가 있고, 헌신하는 자가 있다. 어떠하든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사람 마음이 그렇지만 좋은 것은 원하나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나 내어주는 일에 있어서는 주저한다. 셈이 바르고 계산적인 신앙으로 주 앞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어제는 그런 내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왜 지키지도 못할 율법 곧 말씀을 주시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벌을 주시려는가? 하는 질문을 들었다. 그건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질서한 가운데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속에 사는 것을 보시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율법을 주셨다. 그 의도는 율법으로 누구라도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를 스스로 인정하면 할수록 우린 주의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란다. 자신은 죄인인 것을 고백한다. 곧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것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없다. 아브라함도 노아도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없다. 이로써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앎으로 주의 은총을 구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심으로 나의 본심을 아신다. 저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오늘 이를 증명하듯 사람들, 모든 사람이 격앙되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인다. 저들 또한 전하여지는 말씀을 듣고 어찌할꼬! 하며 격노하다 그리 죄가 임하였다. 그러함에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1).” 그렇다고 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때론 우린 얼마나 우리의 얄팍한 이해와 그 지식으로 성경은 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려 하는지 모른다. 자신의 생활과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졸지에 상대를 업신여기고 매도하는 게 사람의 속내이기는 하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이는,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5-7).
말씀 앞에 속절없는 자신의 됨됨을 인정하는 것이 복이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 이는 영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곧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때론 이 길이 혼자인 듯하나 우리 앞서 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걸어간 길이고 앞으로도 많은 믿음은 후학들이 내딛을 길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가끔은 주께 새로운 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나에게 누구, 어떤 일, 혹은 어려움을 통해서도 주를 더욱 알게 한다. 가령 요즘은 누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저에게 일러주려 하는 생각이 나를 향하고 계심을 먼저 알게 하신다. 저의 이런저런 점을 말해주려할 때 나의 그러한 모습을 먼저 마주하게도 하신다. 혹은 저의 질문으로 나는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을 새삼 인정하는 사람처럼 놀란다. 주가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하여서 특히 내가 사람을 믿고 의지할 때 저의 본성을 보이시며 주를 바라게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의 새 것, 새롭게 나를 이루고 있는 생각과 바라는 것에 때로는 놀란다. 하여 더욱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서로 잘 아는 사이,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 중에 유익한 것은 내 스스로도 부정하고 외면하였던 나의 날들, 그 됨됨이를 돌아보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오늘 스데반 집사도 그에 따른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자행한 일에 대해 말한다. 저들이 격분하여 저를 죽이게 된 것은 그들 양심이 호소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으로 드러낼 때 우린 누구라도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기보다 남을 탓한다. 자신이 어찌 했는데, 하는 마음이 부풀어서 커진다. 상대적으로 남을 낮춘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말씀은 언약이었다. 의지할 전부이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5-7).”
이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2-4).” 오늘 스데반은 설명하고 있다. 저는 이 짧은 시간에 성경을 관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알려준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49-50).” 하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
하는 말에 저들이 격분하기 시작했을까? 우린 누구나 자기 말에 옳다 해주는 사람을 따르지 그렇지 않을 때는 졸지에 적으로 돌린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2-53).” 분명 저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
어쩜 우린 모두가 이러하다. 마음에 찔릴 때 돌이켜 이를 인정하고 잘못을 주 앞에 내어놓으면 좋은데, 그게 우리 힘으로는 어렵다. 아,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스스로의 좌절이 스스로의 완악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런데 사람들은 일제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 이 무서운 일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말한 것뿐이었는데,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5-56).” 그리하여 불쑥 치미는 감정이 감정을 낳고 새로운 감정을 더해서 실망이 원망이 되고 남을 헐뜯음으로 자신들을 정당하게 하는 것으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미움을 길러낸다. 그러니 우리의 속성이나 그 됨됨이가 어떠한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2-103).
말씀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알면 알수록 커진다. 단 한 시도 말씀을 떠나서는 누구를 위하고 섬길 수 없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저들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본디 악하여 나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5-107).
하여,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8).
주 앞에 엎드린다. 그리하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116-117).
이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0).
나로 나의 남은 길에서 더는 그릇된 길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7-8).” 하실 때에, 하나님은 선하시다! 어떠하시든지 선하시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7-1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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