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5-8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빗겨서 일하신다. 사울이 바울 되고, 저를 세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하실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러므로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우린 예단할 수 없다.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지는 곧 적극적인 훼방이다. 역으로 저 또한 그런 처지에 놓이기도 하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23:14).” 저는 졸지에 모두의 적이 된 셈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되어 전하기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자신이 그처럼 신봉하여 따르던 율법에 의해 죽이려 하였던 예수를 저는 그 율법의 완성자로 인정하게 된다. 자주 느끼지만 신념과 신앙은 다르다. 이것이 구분되지 못하면 자신이 아는 ‘자기 복음’에 빠지게 돼 있다. 사울이었던 당시 저의 열심은 그리하여 알지 못하는 사명감에 투철하였다. 이를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리하는 까닭은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2, 3).”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 18:28-29).”
신념에 따른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남은 물론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열심도 저를 어지럽게 한다. 하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는 이 놀라운 기독교의 핵심을 사울이 바울이 되어 정립하였다. 이를 위해 저를 박해자로도 두셨다. 그 일로 저는 절규하며 죽기까지 회개하고 충성하였다. 섣불리 우리가 누굴 정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당시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이었나?
눈 먼 사울에게 보내심을 받는 아나니아는 아뢰어,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13-14).” 이를 주도 다 아시고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하고 명령하신다. 일찍이 저로 그와 같은 신념에 사로잡혀 있게 두신 것도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16).” 그 이유와 목적이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벗어난다. 이에 우리가 누구의 현재를 판단하고 비난할 수 없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주가 더 잘 아실뿐 아니라, 저로 또한 그 쓰임에 합당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우리는 함부로 누굴, 어떤 일을 속단할 수 없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사람, 그의 일을 할 일꾼을 세우신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5-7).”
나로서는 가까운 친구들과 하나 둘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일상에서 주를 찬송하면서 깨달았다. 서로는 종종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줄 몰랐다는 것이나 몇 년 전만해도 서로가 ‘이런 대화’를 나눌 거라 생각도 못하였다는 데서 더욱 놀란다. 우리가 서로 예전에 알던 그런 사이가 아님을 인정하게 될 때 주를 찬송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어찌 우리가 임의로 판단하고 알 수 있었겠나?
우리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서로 달라지고 성장하는 것을 체험한다. 거듭남이란 숨길 수 없는 비밀 같아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이와 같은 고백에 대해 이제는 감격할 뿐이다. 더는 거부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더욱 주를 사랑하게 된다. 친구의 고백은 놀라울 정도로 고맙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이를 우리는 서로에게서 보고 자신으로 이를 증거한다. 결국은 깨닫게 하시는 이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은혜가 아니면 누가 말해도, 어떤 일이 거듭 겹쳐서 일어난다 해도 믿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이는 꼭 사역자로 세우심을 받은 별개의 몇몇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친구에게 설날에 가족들과 드릴 예배 순서와 같이 나눌 말씀을 서너 장의 분량으로 적어 보내었다. 여전히 제사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를 타파하고 안 믿는 형님 앞에서 주의 권능으로 이 일을 실행할 수 있기를 권하였다. 주님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앞서 이혼한 처와는 달리 재혼하여 아이 둘을 낳고 사는 현재의 형수는 한때 예수를 믿던 자라.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나 형님만 설득하면 되어서 안 될 것도 없는데, 문제는 그 술이다. 친구도 여전히 술 한 잔 정도는 괜찮다는 식으로 자신을 허용하는 터라, 거의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형님의 술버릇에 덩달아 동조하는 셈이다. 명색이 연세대 의대 출신으로 저는 예배를 모르거나 예수를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속단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우린 다만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5-8).
이 놀라운 사실을 이제 우리가 서로 말로써 인정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설날 아침 전에 이른 새벽에 서둘러 올라와 주 앞에 먼저 앉아 저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실제 우리로 주의 권능을 행할 수 있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 11:34-35).” 그리하여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신앙을 가지고 분투하는 이들을 축복한다. 아이에게도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 오직 주만 바라기를 기도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나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고 살았던 날을 떠올리며 부디 저들의 오늘이 주의 은혜 안에서 온전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은혜의 증거는 순종이다. 행함으로 믿음은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말로 또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증명은 아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산다는 일은 순종이 있어 그 삶이 달라진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 증거가 된다. 나는 누가 어떤 이의 성공한 이야기를 읽으며 저의 새로운 도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할 때, 그럼에도 묵묵히 순종하고 있는 저의 행함이 더 귀하다고 말해주었다.
가령 친구는 잘 모르겠고, 이해도 안 가고, 더러는 믿기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묵상을 하려 하고, 새벽예배를 나가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수요, 금요,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복되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더러 의무감과 어떤 책임감으로 이에 순종하는 것이면 저로서는 들은 바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었으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7-9).”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게 하시는 이의 은혜로였다. 내가 하는 것은 신념이 되어 억지로라도 복종하고, 하게 하시는 이로 행함은 신앙이 되어 우리로 순종하게 하여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이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더러는 둘러보며 도움을 구하나 우리의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였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7).” 고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에,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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