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전봉석 2024. 2. 24. 04:44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시 135:13-14

 

 

겉과 속이 같기는 힘들다. 같은 민족,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허를 찌른다. 바울도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모두 주를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엄히 경계하셨다.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을 힐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이처럼 엄히 말씀하시는 까닭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저들의 행위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후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하며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3-24).” 저가 우려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을까 하는 거였다.

 

일련의 상황에서 내가 늘 우려하는 게 그것이다. 안 믿는 자들에게는 물론 믿는 자에게도 행여 나의 말과 행동이 자칫 주의 영광을 가릴까 하여 신중하게 된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개의치 않고 내맘대로 행하던 것이 이젠 그럴 수 없다.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누굴 사랑할수록 그 사랑의 대상을 의식하는 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에서 본의 아니게 일이 어그러질 때 마음이 어렵다. 내가 두려운 것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힘들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쉽게 이와 같이 살고 있는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4-5).”

 

오늘은 누구들이 온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렵다. 나름 애쓴다고 애쓴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허사가 될 때 허무하다. 아내는 새로운 ‘아픈 아이’를 두고 마음 쓰고 수고하였다. 그런데 서너 달도 안 돼 그만둔다고 하니 마음이 허탈한 모양이었다. 그만둔대, 하고 무겁게 말을 하는데 해줄 말이 없었다. 있을 땐 힘들어서 다른 아이보다 배로 신경을 썼는데, 그래서도 주의 이름을 자주 부르곤 하였다.

 

우리에겐 종종 거기까지, 하고 느닷없는 선이 그어지고는 한다. 더 다가갈 수 없는 지점에 서면 내가 수고하고 애썼던 일만 떠오르게 된다. 어떤 결실은커녕 하다마는 이런 경우는 사람을 더 힘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주께 맡기기를, 주가 우리 곁에 한 영혼을 두심은 우리로 저를 구원하거나 돌이켜 바른 길 가게 하려하심이 아니다. 다만 저로 인하여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인데, 특히 ‘아픈 사람들’ 곧 상한 심령의 소유자들은 그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이랬다저랬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하면서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아픈 거다. 병든 영혼이다. 우리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자신은 괜찮다, 멀쩡하다 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자가 없고, 그런 자들은 주를 찾지 않는다. 누가 일러주면 싸우자고 군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데 별 수 없다. 다만 그 영혼의 일이라, 저도 알지 못함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를 선대하는 것은 주의 이름 때문이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인정할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들린다. 마음이 어려운데 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아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와 같을까 하여 주께 아뢴다.

 

오늘 여기에 오기까지 저들은 수백 번도 넘게 그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런 것이다. 선뜻 그럴 수 없는 게 병이라, 죄란 주춤거리고 미루고 그러다 주저앉힌다. 바울은 전진하였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르셨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우리의 전진은 주가 하시는 대로 주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이를 시편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시 135:13-14).

 

오늘을 살면서 이 한 날의 수고가 족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나는 오늘 누구와의 만남을 앞두고 주께 맡긴다. 아이도 아이엄마도 모두 그런데, 우리 심령이 상하였다 하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데서 주께로 향한 첫 발을 뗄 수 있다.

 

희한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화가 많거나 짜증을 자주 내는 감정조절장애가 있는 경우 열에 아홉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남 탓이다. 자신은 멀쩡한데 세상이 이상하다. 그러니 우리가 한 영혼을 대한다는 일은 전혀 대화가 안 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를 상대하는 것과 같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바로 거기까지, 주가 정하신 선까지만 하면 된다. 붙이시면 그 붙이시는 동안에만, 오늘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는 찬송이 그래서 유용하다. 지난 어제도, 내일도 내게 맡기신 게 아니다. 늘 오늘, 지금 여기, 이 사람으로 족하였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1-13).”

 

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어떤 일을 겪으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 내가 주를 바람으로 이 모든 상황을 주께로 돌리는 일… 이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오늘 우리의 만남이 주 앞에서 그러하기를. 자신을 인정함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때 주의 사랑으로 귀히 대할 수 있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이고, 눈에 안 보이는 주와 함께 한다는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주의 선하심 가운데서 뜻하시는 바가 있을 터,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 3:13-14).”

 

하여 일련의 이런저런 일 가운데서, 혹은 누구의 일로 인하여 마음이 어려워 힘에 부칠 때 오히려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이 원하시는 바를 행함으로 살 길이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8-9).”

 

얼마 전 친구는 이 구절을 두고 어찌 그러한가 물었다. 성경의 난해한 내용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보는 시점을 달리하면 이해가 쉽다. 주인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데 답이 있다. 우리 주인은 순종을 원하고 제사보다 원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듣는 것, 곧 나의 의사나 주장이 먼저가 아니다. 앞서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주인은 자비를 원하고, 그것으로 서로 위하는 것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지금 있는 상황에서 주를 섬기고 나타내어 내 곁에 두신 한 영혼을 사귀는 일, 그것으로 세상 일이냐, 주의 일이냐 하는 경계는 허물어진다.

 

오늘 본문에서도 서로 같이 공격하다 서로가 나뉜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행 23:7-8).” 각자 저마다의 신앙으로는 갈리고 나뉠 뿐 하나 될 수 없다. 우린 저마다의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주인의 것으로 산다.

 

세상은 오락가락하는 게 당연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스스로 옳다 하다 곧 또 아니라 하는 게 사람 마음이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조만간 결판나기까지 서로가 갈리는 게 당연하였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16:5, 23:17).”

 

오직 주를 바람은 말씀으로 그 중심을 잡는 일이다. 사람들로 인함도 아니고, 어떤 이의 권위로도 아니다. 다만 우린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그러므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8).” 하여 기를 쓰고 성경을 붙든다. 말씀으로 선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9-10).”

 

이에,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1-3).

 

그리할 수 있는 자로 이와 같은 말씀이 들리고 그리 행할 수 있을 때 복이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그러므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5-6).

 

주는 행하신다. 반드시 이루신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3-14).

 

이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21). 아멘.